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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사회론

현대 라캉주의의 전개


  • ISBN-13
    979-11-91535-12-9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에디투스 / 에디투스
  • 정가
    25,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5-31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마쓰모토 타쿠야 , 이정민
  • 번역
    임창석
  • 메인주제어
    자크라캉의 정신분석학
  • 추가주제어
    사회, 문화: 일반 , 사회학 및 인류학
  • 키워드
    #자크라캉의 정신분석학 #사회, 문화: 일반 #사회학 및 인류학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0 * 210 mm, 397 Page

책소개

본래 정신분석에서 향락Jouissance이란 인간이 안정된 상징 시스템(=상징계) 속으로 들어가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실해 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향락하는 것(혹은 상실된 향락이 회귀하는 것)이란 상징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 단적으로 말해 향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띠게 되며 정신분석은 이를 근대 문명의 전제로 파악한다. 프로이트에 이어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향락은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향락'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유지하는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의 죽음과 맞바꿈으로써 비로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체제의 전개와 더불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마디로 '향락'은 목숨을 건 혁명과도 비슷한, 감미로운 파멸로 얼룩진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소비사회에서의 '인조이enjoy', 즉 통제 가능한 것으로 변모했다. 소비자본주의하에서 향락은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락하라!”는 초자아의 명령이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지배한다. 한마디로 현대에는 더 이상 정신분석이 밝힌 상징계의 논리가 '쇠약'해짐에 따라 '불가능한 향락'은 '인조이'가 되었으며 상징 질서를 제어하는 '아버지의 이름' 대신 새로운 질서 유지 장치로서 통계학적 관리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근대 문명에서 전제가 되었던 향락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여라고도 느끼지 않고 어떠한 금지도 알지 못하며 나르시시즘적인 향락에 빠진 현대의 주체들은 이 세상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 전개』는 프랑스어 주이상스를 영어 인조이로 변역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는 라캉의 일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쩌면 말년의 라캉을 사로잡았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이 살았던 1970년대 중반의 '현대'가 명백히 '인조이'의 시대, 즉 '향락사회society of enjoyment'로서의 양상을 노출하던 시대였으며 따라서 기존의 향락과 상징계의 기능 불능이라는 위기 앞에서 정신분석의 갱신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말년의 라캉의 이론은 상징계를 제어하는 '아버지의 이름'(=타자의 타자)은 과거와 같은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징계는 확실한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법'(이나 사회)은 인간들 각자의 향락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며 , 오히려 향락을 길들이기 위한 교활한 수단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전망한다. 문제는 라캉에게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나 전망이 아니라 정신분석이 인조이의 강제 혹은 '향락의 통제'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지배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지, 나아가 그 요체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어로 출간되는 일본의 신예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마쓰모토 타쿠야의 『향락사회론』은 라캉이 1970년대에 사용한 '잉여향락'이나 '자본주의 디스쿠르discours'를 포함한 개념 작업들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라캉이 정신분석 개념의 갱신 작업이 현대의 이론이나 임상, 그리고 정치와 사회에 어떠한 임팩트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탐구한 성과물이다. 특히 라캉 이후 지금까지의 현대 라캉주의의 진화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와 맞서면서 어떠한 내용을 전개해 왔는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소중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시작하면서

 

제1부: 이론

 

제1장 현대 라캉주의의 투시도

1. 현대 정신의학에서 정신분석으로 / 2. 상징계의 쇠퇴와 '아버지'의 복수화 

/ 3. 임상 형태를 다시 묻기 / 4. 섹슈얼리티의 변화 / 5. 증상에서 생톰으로 

/ 6. 무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 7. 새로운 발판 / 8. 남성 측의 도식에서 

여성 측의 도식으로

 

제2장 4(+1)개의 디스쿠르에 대하여

1. 디스쿠르란 무엇인가? / 2. 잉여가치와 잉여향락 / 3. 잉여향락의 막다른 

 

제3장 성별화 도식

1. 키르케고르의 사랑은 궁정풍 연애였던가? / 2. '사물'과 시니피앙, 그리고 

길 / 4. 네 가지 디스쿠르 / 5. 자본주의 디스쿠르 / 6. 현대의 '우울'과 자본 

주의 디스쿠르

불안 / 3. 또다시 『앙코르』를 향하여 / 4. 『사랑의 역사』에 대한 라캉적 독해 

/ 5. 예외를 공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가 되어 버리는 것

 

제2부 임상

 

제4장 DSM은 무엇을 배제했는가?

1. '의도치 않은 결과' / 2. DSM에 의한 신경증의 소멸 / 3. 주체를 배제하는

것으로서의 '과학' / 4. 현대 정신의학을 넘어서

 

제5장 현대의 질환으로서 '우울'

1. 데프레시옹과 멜랑콜리를 둘러싼 정신의학의 역사 / 2. 프로이트의 데프 

레시옹과 멜랑콜리 / 3. 신경쇠약과 현실 신경증의 복권 / 4. 충동의 처리 불 

능과 '자본주의 디스쿠르' / 5. 데프레시옹의 신학 / 6. 데프레시옹의 표상문 

화론? / 7. 현실 신경증의 복권을 향해

 

제6장 '부끄러움이 사멸'된 현대

1. '부끄러움'과 시선[눈초리] / 2. 시선과 수치의 구조 / 3. 대인공포 / 4. 관

음증 / 5. 노출증 / 6. 시선의 라캉적 존재론 / 7. 현대의 '수치의 사멸'

 

제7장 자폐증을 둘러싼 프랑스적 문제

1. 정신분석은 시대착오적인가? / 2. 〈벽〉에 대한 반응과 '정신분석 금지

법안' / 3. 라캉주의의 자폐증 연구

 

제3부 정치

 

제8장 레이시즘 2.0?

1. 헤이트 스피치를 자각하다 / 2. 두 가지 레이시즘론 / 3. 프로이트의 증상

/ 4. 「집단심리학」을 재고찰하기 / 5. 레이시즘에서 '아버지'와 향락의 병리 /

6. 정신분석은 레이시즘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9장 향락의 정치

1. '향락의 정치'에 대하여 / 2. '법은 법이다' / 3. 집단적 동일시에서의 향락

의 동원 / 4. '아버지의 이름'의 질서로부터 '강철의 질서'로

 

제10장 라캉적 정치를 위하여

1. 부인의 주체와 냉소주의적 환상 / 2. 냉소주의를 횡단하기 / 3. 대문자의 

'부정'에서 긍정성으로 / 4. 라캉과 정치 이론 / 5. 대학 디스쿠르에서 분석 

가의 디스쿠르로

 

후기

참고문헌

부록: 향락사회란 무엇인가?

옮긴이 후기

본문인용

라캉은 적어도 1959년의 시점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의식을 지배하는 표준적인 모 델로 간주하기를 멈춘다. '아버지의 이름' 역시 1960년대 전반부터는 “(복수형의) 아버지의 이름들”로 쓰게 되며, 1970년대에 이르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의 심적 구조의 위상학적인 매듭을 서로 연결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은 태도 변화에 따라 그는 비非오이디푸스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을 중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섹슈얼리티를 규범화=정상화하는 오이디푸스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상 모든 욕망은 어찌하든지 도착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밀레는 라캉의 이러한 변화를 “아버지의 길로부터 욕망의 길로 향하는” 이행이었다고 정리한다. [45-46쪽]

 

밀레는 오늘날 시니피앙으로부터 향락으로 이론적 중심이 이전할 것이라 내다보았고, 시니피앙이 아니라 향락의 관점에서 보는 정신병론을 1960년대의 라캉 이론으로부터 도출하였다. 그의 정신병론에 따르면, 파라노이아는 '향락을 타자에게서 발견'(어떤 다른 타자인 타자가 자신을 향락하려고 한다는 망상을 형성한다)하는 병이며, 정신분열증에서는 '향락이 신체로 회귀'(스스로의 신체가 과잉되게 향락적인 것이 되는 자가 성애적인 태도의 회귀를 보인다)하는 병으로 규정한다. [54쪽]

 

후기 자본주의(혹은 소비주의) 체제에서 인간이 향수할 수 있는 잉여향락은 계산 가능한 것이 된다. 우리는 어떠한 욕망의 대상을 통해서 향락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만, 거기서 제공되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상품은 시장 원리라는 질서에 따르는 것이며 계산 가능성의 논리에 의거한다. 나아가 현대의 우리는 대량 소비를 향하여 균질화된 공업 상품을, 그것이 새로 출시될 때마다 즉각 따라잡으려는 끝없는 소비에 휘둘리고 있다. 이는 과거에 욕망을 구동시켰던 결여가 상품을 통해서 메워진다는 것과 같은 말인 셈이다. 잇달아 새로운 상품이 주체에게 당도함으로써 주체의 욕구나 요구가 일시적이나마 즉각 충족된다는 것은, 욕구의 저편에서 나타나야 할 결여를 언제까지고 출현시키지 않은 채 방치해 버리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디스쿠르에서는 상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상실 없이 향락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공상(환상)이 주체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60쪽]

 

라캉 자신이 “해석이란 주체에게서 무의미의 핵을 추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처럼 역방향의 해석이야말로 주체를 스스로의 향락을 향하여 되돌아가게 하고 실재계에서 신체의 사건을 다룰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법인 셈이다.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그 누구와도 다른 주체에게 고유한 향락의 양상, 즉 “하나뿐인 '일자'”라고 불리는 고립된 향락의 모습이며, 다른 시니피앙 S2로부터 떨어져 있는 '단 하나뿐인 시니피앙 S1'으로서의 요소 현상이다. 그리하여 주체는 자신에게 고유한 향락의 양상과 “친해지는” 것, 혹은 향락의 양상을 변경할 가능성으로 유도된다. 밀레가 말하듯이 현대 라캉주의에서 '증상을 읽는다'는 것은 증상의 의미를 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상의 무의미를 읽는 것을 뜻한다. [73-74쪽]

 

한편에는 향락의 상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상실을 메우기 위한 다른 종류의 향락이 발생한다. 잉여향락이 갖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잉여향락이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 향락하지 않는 것'과 '조금 더 향락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요 컨대 인간은 더 이상 향락 그 자체에 접근할 수 없지만, 여전히 잉여향락의 회로를 통해 '좀 더 향락하는 것'을 희구한다. 향락을 둘러싼 이와 같은 배치는 필연적으로 '문명 속의 불만'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지워진 숙명일 것이다. [96쪽]

 

일찍이 침범으로서의 향락(불가능한 향락) 개념이 일종의 혁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잉여향락이라는 개념은 쉽사리 막다른 길로 뛰어드는 향락이 되고 만다. '68년 5월'의 잘 알려진 표어로 “장애물 없이 향락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이는 잉여향락이 가지고 있는 폐색감을 타파하고자 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지만 라캉은 모든 인간에게 향락이 “잉여향락이라는 잔여의 영역에서만 분절화될 수 있다”면 “장애물 없는 향락을 열망하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면서 '68년 5월'에 대해 일종의 비판을 가하고 있다. [98-99쪽]

 

자본주의 디스쿠르에서는 상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 디스쿠르에서 새로운 상품이 계속해서 주체에게 다가감으로써 주체의 욕구나 요구가 즉각 만족되어 버리며, 욕구의 피안에 뚫린 결여를 통해 나타나야 할 욕망의 영역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는 주체를 구성하는 존재 결여를 향해 접근할 수 없다. 즉, 여기에서는 상실 없이 향락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공상(환상)이 주체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라캉이 세미나 『정신분석가의 지식』에서 “자본주의 디스쿠르는 거세를 배제한다”고 말했던 것은 이를 의미한다. (…) 정신분석이 자본주의로부터의 출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디스쿠르가 배제한 거세, 즉 시니피앙과 향락의 양립 불가능성을 또다시 주체 안에 새겨 넣기 때문이다. [108-110쪽]

 

거대 자본과 결탁한 이러한 숫자의 전제專制는 라캉주의 정신분석가들이 최근 “통계학적 초자아”(Brousse, 2009)라 부르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상징적 질서를 통제하는 대문자로 쓰일 수 있을 '아버지'가 소멸한 시대에는 통계학과 같은 알고리즘이 '아버지' 대신에 작용한다. 이 같은 시대의 도래를 자크 라캉은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예상하고 이를 “파멸적 퇴폐”로 평했다. '아버지의 이름'이 기능 부전에 빠진 시대에는 “강철의 질서”가 “실재계에서 아버지의 이름의 회귀”로서 출현하여 일종의 더욱 나쁜 아버지로 기능하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이와 같은 라캉의 예언이 우직하게 실현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이 아닐까. [152쪽]

 

크로살리 코르비는 『우울증—현대의 중심적 정동』에서 “현대의 우울증은 자본주의 디스쿠 르 장치에 새겨진 주체의 이러한 자기 소비/소진에 대한 한 측면이다”라고 주장하며 우울 현상과 자본주의 디스쿠르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자본주의 디스쿠르가 범람하면서 '소비하라!'는 명령이 우위에 서고 욕망하는 주체가 사멸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신병의 “여성으로 몰아대다”를 풍자하여 “소비로 몰아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보면, 충동의 대상/욕망의 원인=대상으로서의 대상 α를 둘러싼 주체의 배치가 자본주의 디스쿠르에 의해 크게 변화하고 욕망의 영역이 사멸해 버렸다는 것, 즉 이제는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이 '우울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8-199쪽]

 

폰티쿠스는 비탄이 욕망의 좌절로 인해 생긴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울을 “비탄”이라 부르고 이를 정신분석의 윤리 차원에 위치시켰던 라캉의 문맥에서 말한다면, 비탄은 '욕망을 양보하는 것'에서 생긴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비탄을 낳은 욕망의 좌절이 “쾌락 때문에 제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서술이다. 앞서 살펴본 소비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디스쿠르—일시적인 소비 활동으로 얻어지는 잉여향락—와 '욕망의 좌절'에 관한 폰티쿠스의 서술은 대단히 닮아 있다. [204쪽]

 

현대는 '수치의 사멸', 즉 사람들에게 수치의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타자'가 약화된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수치를 검토하는 것은 그 임상적 함의뿐 아니라 현대의 상징적 질서의 모습이나 거기서 전개되는 섹슈얼리티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217쪽]

 

우리 자신의 내밀한 것을 알려 주는 대상(타자)으로부터의 시선은 우리 자신의 뜻밖의 모습인 '그 자리와 어울리지 않음'을 드러내 주며, 거기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에로스적인 것도 발생시킨다. (…)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에로스적 응시의 시대가 오늘날에 이 

르러서는 서서히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는 리얼리티 쇼의 유행이나 SNS를 통한 일상생활의 노출, 나아가 모든 장소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배치라는 현상으로 상징되듯이 테크놀로지와 손을 잡은 시선이 모든 곳에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24시간 시선에 노출되어 있으며 시선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 시선이나 감각,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변질된 후에 인간은 도대체 어떠한 에로스와 어떠한 미지의 향락과 조우하게 될까. 이런 물음이 오늘날 시선과 수치를 고찰해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238, 242쪽]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올바른' 향락의 양상을 무엇인가 긍정적인 형태로는 인식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타자가 행하는 '이질적인' 향락의 양상을 부정함으로써만 사람은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인정하거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레이시즘에서는 이질적인 향락의 양상을 갖는 인물들—전형적으로 이민자나 원주민—이 이러한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69쪽]

 

라캉은 현대적 레이시즘에서 배척의 원인이 되는 문화적 차이를 “향락의 양상의 차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인종(민족)이나 출신지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향락의 양상은 단일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다수파는 자신에게 있어 대자(=소수파)의 향락의 양상을 '발전도상', 즉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척하거나 자신의 향락의 양상을 그들에게 떠맡긴다. 여기에서 레이시즘이 발생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 정신분석이 알려 주고 있듯이 우리에게 있어 충분한 향락은 언제나 상실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충분한 향락을 자리매김할 수 없어 '성관계의 부재'에 번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향락의 불가능성은 '어딘가에서 완전한 향락을 취하고 있는 인물=타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환상을 낳는다 밀레는 이러한 라캉의 레이시즘론을 '외밀성extimité'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282-283쪽]

 

정신분석은 성관계의 부재를 해석하는 실천이 아니다. 정신분석에 레이시즘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다는 말은, 정신분석이 그런 의미에서의 해석과는 반대 방향을, 즉 역방향의 해석(반-해석)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해석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분석 주체를 이끌고 부정적인 것 아래서 머물게 함으로써 어떠한 응답을 타자 안에서 찾지 않고서도 살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서서히 분석 주체 각각에게 고유한 향락의 양상이 분명하게 인식될 것이다. 분석이라고 부르는 작업 안에서 이러한 향락의 양상을 특이성=단독성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다면, 그때 인간은 레이시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향락과 동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89-290쪽]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계몽의 결과로서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출현한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형식으로 기능한다. 즉, '나는 엄마가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물신숭배자fetishist의 모습, 즉 프로이트가 '부인'이라고 불렀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젝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이가 엄마의 신체에서 페니스의 부재라는 참아 내기 힘든 광경=외상적 구멍을 보지 않고 해소시키려면 어떤 덮개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에서도 그 이데올로기가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 외상적 구멍이 존재하고, 이데올로기는 그 구멍을 가리기 위해서 어떤 물신이 되는 대상을 이용하게 된다. (…) 그 이데올로기가 덮어서 감추려고 하는 참기 어려운 광경=외상적인 구멍, 즉 그 이데올로기가 의거하는 공상에 잠겨 있는 향락의 차원을 폭로해야 한다.[312-313, 315쪽]

 

1970년대 라캉에 따르면, 시니피앙(S1)은 인간이 최초로 언어와 만날 때 나타나는 '일자'적인 향락의 시니피앙으로, 이후의 인생에서는 반복 작용에 의해 지식의 시니피앙(S2)으로 대체된다. 때문에 정신분석에서 추출되는 단 하나뿐인 시니피앙(S1)은 통시적으로 본다면 과거에 있었던 말이면서 전혀 새로운 향락적인 말로서 도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도래할 새로운 시니피앙은 '전체'의 논리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를 교란시키고,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밑바닥부터 변하게 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진 특이적=단독적인 시니피앙은 그 정의로 볼 때 다른 것과 절단된, 철두철미하게 '일자'적인, '단 하나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적 특이성=단독성을 어떻게 집단과,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향한 것으로 접속시키고 활력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336쪽]

서평

정신분석이 이끄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돌파구

 

주목 받는 신예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마쓰모토 타쿠야의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에 이은 

또 하나의 문제작.

 

라캉이 「수치에 관한 노트」에서 '68혁명'의 주체들을 향해 “너희들이 즐기고 있는 것을 똑바로 보라”고 했을 때 그의 비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자본주의가 향락과 맺고 있는 관계가 드러나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68년 5월'의 잘 알려진 “장애물 없이 향락하라!”라는 구호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질서에 대한 해방을 꿈꾼 것이었지만 그들이 몰아낸 주인의 자리엔 또 다른 주인이 등장했을 뿐이었다. 왕의 목을 자른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본격화했듯이, 억압적인 근대 국가 질서가 도전받은 이후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저항의 구호였던 자유와 향락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삼키고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고도화해 갔다. 그와 함께 미국의 반전운동 세대가 월가로 진출했듯이 '68년 5월'의 주체들도 나중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질서로 합류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일본의 신예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마쓰모토 타쿠야의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의 전개』는 라캉이 주이상스Jouissance(향락)이라는 프랑스어를 인조이enjoy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는 1975년의 일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라캉이 굳이 주이상스를 인조이와 구분하려 한 까닭은 무엇일까. 본래 정신분석에서 향락은 인간이 안정된 상징 시스템(=상징계) 속으로 들어가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실해 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향락하는 것은 (혹은 상실된 향락이 회귀하는 것)이란 상징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하자면 향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띠게 되는 것으로 “Enjoy Coca Cola”와 같은 광고 문구에 쓰이는 인조이와 같은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서의 향락은 '불가능한 향락'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유지하는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의 죽음과 맞바꿈으로써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상황은 달라진다. 말년의 라캉이 목도하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법'(이나 사회)은 인간들 각자의 향락을 죽이는(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살리며, 오히려 향락을 길들이기 위한 교활한 수단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향락'은 목숨을 건 혁명과도 비슷한, 감미로운 파멸로 얼룩진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소비사회에서의 '인조이', 즉 통제 가능한 것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정신분석이 인간 각자의 고유한 욕망(향락)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며, 이는 1970년대의 라캉 이론과 그 이전의 그의 이론 적 작업 사이의 단절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처음부터 대타자로서의 '아버지'가 확고한 '아버지'로서 존재한다는 가정, 즉 모든 것을 포섭하는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에 의해 지탱되던 프로이트의 이론이 전개되던 시대와 다른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정신분석의 라캉 시대'는 상징계를 제어하는 '아버지의 이름'(=타자의 타자)은 과거와 같은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징계는 확실한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상징계가 마치 확실한 근거에 기반을 둔 안정된 시스템인 것처럼 기능한다는 것은 인간(=신경증자)이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며, 그래서 “이상적 아버지의 이미지는 신경증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현대의 라캉주의를 주도하는 자크 알랭 밀레에 따르면 오늘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아버지의 기능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이는 왕의 목을 친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것이며 산업혁명은 또 다른 굴절점이 된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힘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효과는 확고하게 안정되어 있던 것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즉 '아버지'와 같이 상징 질서를 제어하는 제3항이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여 '상징계의 기능 부전' 혹은 쇠약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바야흐로 '아버지'(혹은 대타자)가 쇠약해지거나 사라진 뒤 도래한 것이 바로 '향락사회society of enjoyment'이다. 여기서의 향락은 '불가능한 향락'과는 다르며 '인조이'로서의 향락이다. 이러한 향락은 결여되거나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노출된다. 오늘날은 누구라도 손쉽게 SNS를 통해 스스로의 심정을 토로하며 감춰져야 하는 내밀한 사정을 아주 쉽사리 외부에 노출시킨다. 이와 병행하여 귀에는 이어폰, 눈으로는 VR의 고글, 입으로는 공갈 젖꼭지를 문 채 마음에 드는 대상을 언제나 향유하는, '기어이 향유하고 마는' 주체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한마디로 현대의 주체는 근대 문명에서 전제가 되었던 향락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여라고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증상이나 문화를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상징계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금지도 알지 못하며 나르시시즘적인 향락에 빠진 인간이 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과거와 같은 상징계의 '법'이 무효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려 들 게 마련이고 이때 질서 유지 장치로서 작동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닌 향락을 강요하는 사나운 초자아이며, 그것의 현실적 구현으로서 통계학적 관리가 등장하게 된다. “향락(소비)하라!”는 초자아의 명령이 지배하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눈을 현혹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통해서 얻는 의존증적인 향락에 매달린 자유이며, 이 소비의 자유조차 일상적 배제를 원리로 삼는 노동사회에서 탈락하지 않을 한에서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현대란 이른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신뢰를 전제로 한 포섭 시스템이 파산하고 모두를 일상적 배제의 시스템 안에 두는 시대이다. 한동안 출판계에도 유행처럼 등장했던 '피로사회'니 '□□사회'니 하는 용어들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려는 데서 파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진단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인조이'로서의 향락의 과잉된 강제에 의해, 그리고 그 결과로 소비되는 다양한 소품이 가져다주는 의존증적 향락에 저당 잡힌 현실에, 표피적인 자유의 이면에 도사린 거대한 불안과 우울로 서서히 질식해 가는 현실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이다. 다른 인문사회과학과 달리 정신분석이 이론이면서 동시에 임상 실천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의 전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눠 후기 라캉 이론과 여기서 발전되어 나간 현대 라캉주의 이론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제1부에서는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 개념인 '향락'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에서 라캉을 거쳐 이른바 현대 라캉주의에까지 이르는 정신분석의 '이론'을 새로이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라캉주의의 투시도를 명쾌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후기 라캉 이론의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 '잉여향락'과 '자본주의 디스쿠르' 개념을 통해 현대의 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마치 향락을 온전히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품게 하고 향락의 결여를 일시적인 방식으로 메워 버리며, 인간의 욕망을 자본 증식의 발판으로 삼는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데 라캉주의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해 낸다. 즉 '자본주의 디스쿠르'를 통해서 구동되는, 다른 누구로부터 '감염'된 흔해 빠진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특이성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정신분석은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피난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2부에서는 정신분석의 '임상'에서 현재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설명된다. 정신분석이 임상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는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정신분석과 조작적 진단 DSM을 적용하는 현대 정신의학과의 대립의 문제를 포함하여 현대에 두드러지는 병태인 우울증과 수치, 자폐증을 다룬다. 조작적 진단은 정신분석적인 '주체'의 문제를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며, 그 실제적인 양상은 결여를 모두 메워 버림으로써 과거의 향락을 질식사시키려는 현재의 규범적 모델이 된다. 어쩌면 현대의 우울증은 자본주의 디스쿠르를 통해 결여를, 나아가 욕망이 고갈된 현대인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수치론은 향락의 '노출'과도 공통되는, 과시적인 향락이 전면에 등장한 향락사회의 모습을 비추어 줄 것이며 자폐증은 현재 문제시되는 정신분석과 (인지)행동요법의 대립을 보다 명확하게 부각시켜 준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명백하다. 그것은 “구조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아는” 것이 가능하도록 '우울'한 환자에게 주체적 계기를 기다릴 시간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은 수치에 의한 측정과 단조로움으로 지배되는 자본주의 디스쿠르의 내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디스쿠르에 저항할 것인지를 사고하고 활동하는 시간이다. 이 같은 치료적 실천이야말로 '우울'한 환자가 스스로의 인생을 특이한 것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임은 분명하다. 즉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각자의 독자적 향락의 양상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실천으로 추구하는 일이다.

 

제3부에서는 '라캉 좌파'적인 경향에서 현대의 '정치'적인 사태를 다룬다. 고전적인 것과 구별되는 현대의 레이시즘(racism, 인종주의)은 이제 국지적인 상황을 넘어 세계적인 현상으로 극우주의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라캉이 동시대의 레이시즘을 해석하고 이에 대응하려 했던 것을 이어서 레이시즘을 작동시키는 결국 '향락의 변질'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규명한다. 나아가 '통계학적 초자아'의 시대에 상상계의 병리는 사라지지 않은 채 곳곳에서 출몰하는 현실에서 라캉의 영향을 받은 정치 이론을 검토하면서 그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의 전개』에서 저자는 과감히 1970년대의 라캉 이론과 그 이전의 그의 이론적 작업 사이의 단절을 인정하고 말년 라캉의 향락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듯 개념의 갱신 작업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일은 정신분석 이론이 현대의 이론이나 임상, 그리고 정치와 사회에 어떠한 임팩트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재검토하는 것으로까지 연결된다. 라캉 사후 지금까지의 현대 라캉주의의 본류가 현대자본주의의 변화에 맞서 어떠한 대응을 전개해 왔는지에 대한 자료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소중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정신분석 담론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 신선한 자극이 되기를 기대한다.

저자소개

저자 : 마쓰모토 타쿠야
일본의 정신의학자, 현대사상 연구자이다. 전공은 정신병리학과 정신분석학이며, 라캉파의 정신분석과 사상,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현대 철학의 제 분야를 탐구해 왔다. 의학박사(지치의과대학自治医科大学 大學院, 2015년). 현재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 · 환경학연구과·종합인간학부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자크 라캉과 감별진단의 사상』, 『증례로 이해하는 정신병리학』, 『창조와 광기의 역사』, 『'마음의 병이란 무엇일까?'』가 있으며, 공저로는 『천사의 음식을 찾아서―거식증에 대한 라캉적 접근』, 『일루미네이션』, 『뉙스』, 『 '연결'의 현대사상』, 『자폐증학을 권장함』이 있고, 『손의 정신사』, 『현실계
를 향하여』, 『정동과 정신분석―라캉이 정동에 대하여 말했던 것』 등을 일본어로 옮겼다.
번역 : 임창석
프랑스 랭스Reims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으며(DEA,1989), 이후 정신분석에 관심을 갖고 교육분석을 받았다. 예술학 박사. 『라캉 대 라캉』, 『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와 광기의 역사』,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를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 : 이정민
동아시아 정신분석 수용사 연구자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만 타이베이 소재 중국 문화대학 한국어문학과 조교수로 근무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초기 정신분석학 수용에서 일본의 영향: 김성희와 고사와 헤이사쿠의 이론적 유사점을 바탕으로」와 「한국의 프로이트 이론 수용 양상 연구」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라캉, 환자와의 대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캐릭터의 정신분석』, 『라캉과 철학자들』(이상 에디투스) 등이 있다.
라틴어〈édĭtus〉는 “출판된, 드높은, 높이 솟은, 탁월한”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책에도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편집자적 사유와 거기에 발 딛고 선 정신일 거라는 생각이 이 오래된 단어를 출판사 이름으로 정하게 했습니다.
에디투스의 시작과 끝에는 하나의 윤리적 질문―어떤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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