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법원에서 일하는 판사들과 회생위원 등 담당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회생・파산 업무가 한계채무자를 위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생기는 반감일 것이다. ‘채무자 프렌들리’한 채무자회생법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막상 사건을 대하다 보면 부정적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의 이타심과 도덕적 양심에 대한 기대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마치 수사관처럼 신청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채무자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된다. 업무 담당자에게 바람직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엄격한 자세로 일관하다 보면 제도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업무에 적응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에는 제도가 요구하는 융통성을 따라가게 된다.
#25쪽_1장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를 위한 마지막 비상구: 회생·파산제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 채무의 성격을 살펴보면. 악의를 품은 투기나 낭비 혹은 게으름 때문에 진 빚이 있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진 빚이 있다. 신청인의 빚의 성격을 판단해야 하는 채무자회생법은 채권자와 채무자, 도덕과 법률의 딜레마 모두를 안고 있다. 이 딜레마를 풀어내는 것은 ‘무엇이 개인이나 사회에 유리한가?’에 대한 결정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우려하는 도덕적 해이를 방치해서도 안 된다. 또 파산제도의 선한 손길을 악용하는 이용자의 불순한 의도도 막아야 한다.
#47쪽_1장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를 위한 마지막 비상구: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는 어떻게 가려내나요?
가상화폐나 주식 투자에 실패한 이들에 대해 회생·파산 신청을 받아주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비난이 거세다. 그 핵심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들에게 가상화폐나 주식에 투자하라고 떠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을 적극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억울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처럼 말 못하는 ‘회생·파산제도’를 대신해 변명을 해보고자 한다. 회생·파산제도의 변명 또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처럼 자못 철학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113쪽_2장 착한 제도의 불편한 얼굴들: 가상화폐나 주식 투자와 관련한 회생·파산제도의 변명
상속재산 파산제도는 장점이 많은데도 신청 비율이 낮다. 서울회생법원에 제출된 2023년 9월 파산 신청 수 총 722건 가운데 상속재산 파산 신청이 21건(2.91%)이었다. 연중 통계로 보더라도 이와 비슷한 비율이다. 왜일까? 그 이유는 첫째 상속재산 파산제도와 그 장점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둘째 상속재산 파산제도가 파산제도의 일종이기에 신청인이 ‘파산’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셋째 아직까지 신청 자체가 어렵다는 선입견이 많아서다. 따라서 민법상 한정승인과 재산분리제도를 통합해 상속재산 파산으로 제도를 일원화시키는 입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162쪽_2장 착한 제도의 불편한 얼굴들: 상속재산 파산제도를 아시나요?
회생법원에는 판사와 회생위원 그리고 직원들 외에도 관리위원과 파산관재인 등 업무를 지원하는 전문가들이 존재한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들은 금융권과 기업재무 분야에서 수십여 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회생법원의 전문성을 보충해주고, 개별 사건에서 법원을 대신해 파산 신청절차를 진행하기도 한다. 회생법원에서 일하는 누구나 어느 정도 업무에 능숙해지면 이 정도 질문에는 기분 나쁘지 않게 답할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채무자를 파산시켜주나요?” “아니, 이런 나쁜 기업을 회생절차를 통해 살려주다니요. 말이 되나요?”
#187쪽_3장 불편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 법원의 재판과 업무에 대한 여러 시각들
회생법원 파산과에서는 법인회생·파산 사건과 개인파산 및 일반회생 사건을 담당한다. 그러다 보니 분노한 채권자들의 원성을 많이 듣는다. 채권자집회에 참석한 채권자들의 거친 항의도 감내해야 하는 직원들은 샌드백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 채무자도 아닌 법원 담당자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분명 부당하고 불편하다. 법원 담당자들이 억울한 이들의 가슴을 다독거리고 화를 가라앉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196쪽_3장 불편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 “선생님께서는 안타깝지만 악성 민원인이십니다.”
정당한 계약에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법언은 옳다. 하지만 개인이 어찌할 수 없이 채무를 지게 되었을 때가 문제다. 변제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경제적 파탄 상황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약속은 지켜져야 할까? 빌려준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책임도 없는 걸까? 왜 빌린 이들의 의무만 존재하는 걸까? 이는 철학적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존재론적 문제이며 생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에 그 누구도 답을 주지 않는다. 곧 ‘빚을 못 갚을 권리’가 존재하는가에 관한 인식의 이야기다. 결국에는 약탈적 대출을 권하는 금융 시스템으로 거대한 이익을 취하는 금융 채권자로부터 일정 부분 양보를 얻어내야 한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활용해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금융산업은 부실 채권이 포함된 상품을 설계해 매년 막대한 순이익을 남기고 있다. 채권자의 양보는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
의 갱생을 위한 회생・파산제도의 정당성과 관련해 중요한 근거 중 하나다.
#249쪽_4장 따뜻한 마음을 품은 정책을 꿈꾸며: 더 따뜻한 회생·파산제도가 되기를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생·파산제도는 사회경제적 F코드다. 사회가 더 안정화되고 진보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진 나라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회생·파산제도를 운용한다. 최근 들어 사회주의 시스템을 가진 중국이나 베트남에서조차 회생·파산제도를 활발히 운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회생·파산제도는 가장 진보적인 법제도 중 하나다. 아마도 사회경제적 위기가 일상화되면서 경제적 약자를 구제할 필요성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고, 이에 따라 더 섬세한 제도 운용이 요구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약자가 생존하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회생·파산제도는 제도가 가진 일방성과 양면성 때문에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다. 회생·파산제도가 더 바람직한 제도로 도약하기 위한 ‘F코드’는 무엇일까?
#287쪽_4장 따뜻한 마음을 품은 정책을 꿈꾸며: ‘F코드’라는 난관 넘어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