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는 다섯 살에 잃은 엄마를 대신해 자상한 소피에 누나에게 엄마의 정을 느끼곤 했다. 누나의 죽음은 사춘기를 맞은 뭉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열네 살 뭉크의 정서와 감정은 더욱더 불안정해졌다. 그는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죄의식에 휩싸였다.
소년 뭉크는 자신의 병이 소피에에게 전염되었다고 자책했으며, 자신을 대신해 누나가 죽은 것이라는 극심한 죄의식을 느꼈다. 이 마음의 부담감은 9년 후 〈아픈 아이〉로 탄생했다. 뭉크는 의지하던 누나 소피에를 잃은 정신적 충격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다.
_21쪽
뭉크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질병, 죽음, 광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뭉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질병, 죽음, 광기를 덮어두거나 외면하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삶을 택했다. 뭉크의 일기를 보면 그가 이러한 고통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 고통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이다.
고통은 나와 하나이기에 그것이 파괴되면 나도, 예술도 파괴될 것이다.
— MM T 2748, 1927~1934년 스케치북 (2024-6-14)
뭉크가 기록한 대로 그의 예술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뭉크의 삶은 고통의 해결책이자 인생 사용 설명서였다. 뭉크 예술의 위대함은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_65~66쪽
뭉크는 개인전을 열어준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이때 전시된 작품들은 〈봄〉, 〈키스〉, 〈그 다음 날〉이었다. 〈봄〉은 〈아픈 아이〉의 변형이었다. 그러나 오전 10시 전시장 문이 열리고 채 한 시간이 못 되어 큰 소동이 벌어졌다.
급진적인 뭉크의 예술은 베를린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베를린 미술가 협회는 뭉크의 전시를 지속하자는 쪽과 철회하자는 쪽으로 정확히 반으로 나뉘었다. 뭉크를 지지하는 젊은 회원들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 박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뭉크의 전시를 철회하려는 원로 회원들의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투표 결과는 120 대 105였다. 그렇게 전시는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으로 뭉크의 전시는 일주일도 못 돼 막을 내렸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가 베를린 미술계에 일으킨 파란은 전시 폐쇄로 끝나지 않았다. 뭉크의 전시가 촉발시킨 싸움은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원로 대 신진의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이 싸움은 독일 현대 미술사를 통틀어 최대의 스캔들로, 바로 ‘뭉크 스캔들’이다.
_99~100쪽
뭉크는 티스와 같이 의지가 되어주는 이들의 전신 초상화를 그려 그 그림들을 야외 스튜디오에 호위무사처럼 둘러 세웠다. 그 전신 초상화들은 뭉크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초상화들은 야외 스튜디오에서 거센 비, 바람, 눈을 그대로 맞았고 캔버스에는 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았다. 또 새, 개, 말 등 온갖 동물의 배설물도 묻었다. 티스의 초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를 맞고 눈이 쌓였다 녹은 얼룩이 그대로 남았다.
뭉크에게 왜 이렇게 작품들을 혹사시키느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었다. 뭉크는 캔버스에 시간의 층이 쌓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전신 초상화에는 뭉크와 보낸 시간 만큼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는 셈이다.
_110쪽
뭉크는 밀리와 이별한 후 느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이별〉로 그려냈다. 하얀 옷을 입은 밀리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향해 걷고 있다. 밀리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다 뭉크의 목을 휘감고 심장 가까이 흘러내렸다. 떠나가는 밀리를 잡을 수 없는 뭉크는 심장이 아픈 듯 움켜쥐고 있다. 첫사랑 밀리는 뭉크의 심장이었다. 뭉크는 사람이 이별할 때 심장이 아프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똑똑히 느꼈다.
뭉크는 〈이별〉을 그리기 전 뜯겨진 심장을 직접 보기 위해 도살장을 방문해 소의 도축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무자비한 도축업자의 손에 큰 황소가 쓰러지며 울부짖었다. 도축업자가 무자비하게 황소의 심장에 단도를 꽂았다. 얼마 후 소의 심장도 펄떡임을 멈췄다. 무자비한 도축업자처럼 밀리는 뭉크의 심장을 도려냈다. 뭉크의 사랑도 멈췄다.
_125~126쪽
〈질투〉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의문의 남성이다. 이 작품은 뭉크와 다그니, 프시비셰프스키의 삼각 관계 이야기다. 뭉크는 자신과 다그니를 아담과 이브로 그리고
다그니의 남편 프시비셰프스키를 질투에 사로잡힌 남성으로 만들어 엉뚱한 삼각관계를 그렸다.
다그니가 결혼한 후 뭉크는 그저 다그니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그니를 향한 애타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그림은 또 있다. 뭉크는 또 다른 〈질투〉에서 무관심한 프시비셰프스키의 모습을 담았다. 전면에 크게 그린 프시비셰프스키의 얼굴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독일어로 ‘녹색’은 ‘애송이, 풋내기’라는 의미여서 다그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프시비셰프스키를 조롱하는 뭉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_137쪽
마침내 뭉크는 툴라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뭉크와 툴라는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오스고르스트란의 집에 마주 앉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뭉크는 브랜디만 연신 마셔댔다. 술기운에 취한 뭉크와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툴라는 이제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은 말싸움으로 시작해 몸싸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실수로 뭉크가 집에 가지고 있던 권총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누가 총을 발사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뭉크가 남긴 기록에서는 툴라가 총을 발사했고 자신이 그 총의 총구를 막다가 손가락에 총상을 입은 것이라 했다.
총알이 박힌 뭉크의 왼손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고 그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뭉크는 마취를 거부하고 자신의 수술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의사는 뼈를 관통해 박힌 총알을 제거하고 부스러진 뼈를 갈고 다듬고 살을 꿰맸다. 이 과정은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뭉크는 이 과정을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_156~157쪽
어느 날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보니 각각의 그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작품들이 나란히 배치되자 즉시 음표가 되고 서로 어울려 하나의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다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 MM N 46, 1930~1934년 메모 (2024-6-10)
뭉크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씩 보여주는 것보다 여러 작품을모아 보여주는 것이 대중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뭉크는 각각의 작품을 하나의 음표로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음표가 모여 위대한 화성을 이루고 마침내 교향곡으로 완성된다고 믿었다. 《생의 프리즈》는 이렇게 탄생한 뭉크의인생 교향곡이다.
_185~186쪽
그림은 안 팔리고 월세 임대료는 자꾸 밀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집주인은 밀린 집세를 받으려 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뭉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를 눈치챈 뭉크는 절대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하필 그날이 작품들을 살롱에 출품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뭉크는 고민 끝에 2층에서 작품을 던져버렸다. 그의 친구들은 그 작품을 주워 마차에 실었다. 흙바닥에 작품을 던지다 보니 작품 표면에 흙이 묻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했다. 이때 〈여인의 세 시기: 스핑크스〉로 추정되는 작품도 가운데 구멍이 났다.
그는 마차에 타자마자 아까 던져서 구멍 난 캔버스를 접착제로 메우며 살롱으로 향했다. 어렵게 지켜낸 작품들은 살롱에 무사히 출품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출품했건만 그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_207~208쪽
〈절규〉의 핏빛 구름 속을 자세히 보면 “미친 사람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라는 작은 낙서가 있다. 이 낙서는 작품이 제작되고 11년이 흐른 1904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미술관 측은 이 낙서를 작품에 불만을 품은 관람객이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2021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작품 복원 과정에서 필체 감정을 통해 이 낙서를 뭉크 본인이 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_221쪽
뭉크의 뒤끝은 사람뿐 아니라 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에켈리에서 은둔하던 뭉크는 이웃집 개가 말썽부리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 개는 좀 사나운 편이었는데 어느 날 뭉크의 다리를 물었다. 너무 화가 난 뭉크는 개 주인을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뭉크는 〈화난 개〉라는 그림을 그렸다. 뭉크는 개 물림 사고가 나고 한참 시간이 지난 1940년대에 그 사나운 개를 멍청한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_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