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의 스포츠가 민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극일(克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구는 식민지 조선에 적합하지 않았다. 조선 민중들은 야구 경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팀이 결국에는 승리하는 야구 경기를 굳이 돈을 내고 지켜봐야 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야구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스포츠’로 치부됐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_PART I―1. 일제 강점기 야구 독해법: ‘귀족 스포츠’ 또는 ‘일본 스포츠’
당시 학생 야구 선수들은 값비싼 용품에 멋진 유니폼을 차려입고 경기를 치러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뭇 여성들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에서 학생 야구 선수는 매우 드물었다. 이들은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조선인들이 대부분인 시대에 선택받은 ‘야구 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_PART I―2. 고시엔 대회와 조선 엘리트 동화 정책
물론 공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1937년 기준으로 보면, 조선인 인구는 약 2,200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립고보와 사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을 모두 합쳐도 1만 5,454명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립고보를 통한 조선 사회의 야구 대중화는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수재들이 다녔던 공립고보의 야구 전통은 한국 사회에서 야구가 명문교의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줬다. 해방 이후 야구가 이들 학교의 교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_PART I―3. 조선 엘리트의 요람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야구를 이식한 일본
이들에게 야구는 조선에서 사회 특권층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문화 자본’이었다. 일본 유학파 엘리트들에게 야구는 선진 근대 문화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조선 민중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야구 실력에 관계없이 조선 사회에서 명사 대접을 받았다. 이 와중에 야구는 조선 사회에서 집안 좋고 학력도 높은 도련님들의 스포츠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적지 않은 일본 유학파 야구인들은 이후 정관계를 주름잡는 고위 인사가 됐다.
_PART I―5. 친일파와 지일파의 문화 자본이 된 야구
전원 조선인으로 구성된 휘문고보 야구부의 고시엔 대회 8강 진출 자체는 조선의 자존심을 세운 쾌거였다. 이를 가능케했던 힘은 엄청난 재력의 학교 설립자 민영휘와 일본 야구계가 인정했던 재능 박석윤에게서 나왔다. 조선 사람들은 휘문고보가 조선 예선에서 일본인 학교를 제압할 때 열성적인 응원을 했고, 대회 본선에는 재일 조선인들이 경기장에 몰려와 휘문고보의 선전에 환호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 조선 야구는 휘문고보처럼 친일 인사들의 후원과 지도하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야구를 잘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돈과 기술은 주로 이들에게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_PART I―6. ‘귀족 학교’ 휘문고보의 고시엔 8강 진출의 비밀
해방 공간에서 야구로 명문교의 지위를 획득한 경남중학의 사례는 이 시기 야구가 일제 강점기의 경험과 미군정 시대라는 특수성이 혼합돼 발전했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일본에서 선진 야구를 경험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일했던 장종기 감독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경남중학은 이 시기 최고의 야구 팀이 됐으며, 경남 지역과 부산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명문교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쌓게 됐다.
_PART II―2. ‘학원 야구’의 열기와 야구 명문교의 등장
한국 야구가 이룬 쾌거에 박정희 의장은 크게 기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과의 경기가 펼쳐지기 이틀 전 〈경향신문〉에는 박정희 의장이 한일 회담에서 일본 측의 입장을 상당히 반영하는 대신, 4,000만 원 상당의 수표를 일본 모 기업으로부터 수수했다는 의혹에 관한 기사가 1면 톱 기사로 실렸다. 대통령 선거가 보름 남짓 남았던 시점에서 보도된 이 기사 때문에 박정희 의장과 그의 측근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사실 관계를 떠나 가뜩이나 박정희 본인의 친일 문제가 대선을 앞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_PART III―3. 박정희가 1963년 야구 한일전 승리에 기뻐했던 이유
야구는 축구와 달랐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은행과 상업학교는 조선 야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있었던 상업학교나 일제가 설립한 은행에서는 야구 팀 육성에 관심이 지대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 20회 펼쳐진 고시엔 야구 대회 조선 예선에서 상업학교가 9회나 정상에 오른 것만 봐도 당시 상업학교 야구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_PART III―4. 상업고 동문과 은행 야구 팀의 등장
4대 일간지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고교 야구 대회 관련 기사를 한 달 전부터 끊임없이 양산했다. 이 시기에 고교 야구 대회 결승전 관련 보도는 4대 일간지 1면부터 크게 다루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스포츠와 관련된 갖가지 정보를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1970년대에는 고교 야구에 관련된 정보를 사실상 4대 일간지가 독점하고 있었다. 고교 야구 팀의 역사, 올해 전망이나 유망주 소개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4대 일간지를 봐야 했다.
_PART IV―5. 신문사 주최 고교 야구 대회와 패자 부활전
아시아 야구 대회는 야구 중계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이 대회는 한국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스포츠 중계 방송료가 책정된 대회였다. 대한야구협회는 이 대회의 각 경기마다 1만 원씩의 중계 방송료를 방송사에 청구했다. 당시 1만 원은 금 10돈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다.
_PART IV―6. 라디오와 TV를 지배한 고교 야구 중계
1960년대 말 롯데의 핵심 사업 분야는 추잉 껌이었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 무역 자유화 정책을 펴면서 미국 추잉 껌 제조 회사의 일본 진출이 가시화됐다. 미국 회사의 일본 진출은 롯데의 매출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었다. 나가타는 일본 진출을 노렸던 추잉 껌 제조사 리글리의 오너도 미국 프로 야구 팀 시카고 컵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신격호 회장은 나가타의 요청을 수락했다. 기시 전 총리는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을 통해 농림수산성에 압력을 가했고, 리글리의 일본 진출을 2년 뒤로 미뤘다.
_PART V―2. 재벌의 야구 팀 창단을 이끈 재일 교포 신격호
야구 명문교 출신 인사들의 학연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프로 스포츠 출범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이상주에게 프로 야구 창설의 주역이 되는 이호헌을 소개해 준 사람은 우병규 정무 제1수석이었다. 우병규 수석이 이호헌과 마산상고 동문으로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우 수석의 천거로 이상주 수석과 만나게 된 이호헌은 그의 서울대 상대 시절 동창생이자 군산상고 신화를 만들었던 이용일과 함께 프로 야구 창설 계획안을 작성하게 됐다. 프로 야구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학연의 힘은 이처럼 중요한 요소였다.
_PART VI―2. 프로 야구 출범에 영향을 준 청와대 수석들
프로 야구는 한국 프로 스포츠 가운데 중계권료 상승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리그다. 1982년 3억 원에서 출발한 프로 야구 중계권료는 2023년 현재 연간 760억 원으로 올랐다. TV 방송사가 지불하는 중계권료는 1년에 540억 원이며, 통신사와 인터넷 포털이 내는 유무선 중계권료는 한 시즌에 220억 원이다. 프로 축구, 프로 농구, 프로 배구의 한 시즌 중계권료를 모두 합쳐도 프로 야구 유무선 중계권료에도 미치지 못한다.
_PART VI―7. 프로 야구의 중계권 잭팟과 WBC
《야구의 나라》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학연’은 한국 주류 사회가 야구를 사랑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학연’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들의 ‘야구 동맹’은 해방 직후 청룡기 야구대회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은행단 야구 팀의 창단과 프로 야구 출범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1970년대 고교 야구의 전성기가 찾아온 이유도 학연이었다. 명문고 동문들이 후원했던 고교 야구는 곧 학교 담장을 넘어 지역 간의 경쟁으로 발전했고, 그 체제를 프로 야구가 그대로 이어받
아 한국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_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