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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

한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어떻게 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들었나


  • ISBN-13
    979-11-88949-62-5 (93910)
  • 출판사 / 임프린트
    틈새책방 / 틈새책방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2-29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이종성
  • 번역
    -
  • 메인주제어
    사회사, 문화사
  • 추가주제어
    야구
  • 키워드
    #사회사, 문화사 #야구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35 * 205 mm, 328 Page

책소개

·일제 강점기 ‘귀족 스포츠’였던 야구는 어떻게 전 국민이 열광하는 스포츠가 됐을까? 

·한국 스포츠사의 가장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문화사로 풀어낸 역작

·야구 명문교의 ‘학연’과 정치·경제·미디어·문화 엘리트의 결합이 건설한 야구의 나라

 

야구 애호가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 출간됐다. 《야구의 나라》는 우리나라의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미스터리인 “왜 야구는 축구를 제치고 최고의 인기 스포츠가 되었을까?”에 대한 해답이다. 한양대학교에서 스포츠문화사학을 연구하는 이종성 교수는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된 과정을 추적했다.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된 데에는 엘리트들의 학연이 절대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명문교의 교기(校技)였던 야구는 질시의 대상이었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 축구와는 달리 비싼 장비가 필요한 야구는 귀족 스포츠였다. 게다가 일제는 야구를 통해 내선융화를 노리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고시엔 대회 예선을 열었고, 조선인 팀이 선전하면 내선융화의 증거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야구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엘리트와 귀족을 상징하는 야구는 해방 이후에도 지역 명문교를 상징하는 스포츠가 됐다. 경기고, 경복고, 휘문고, 배재고, 경남고, 경북고, 광주일고, 전주고 같은 지역 명문들과 선린상고, 군산상고, 마산상고 같은 상업고등학교, 신일고와 충암고 같은 신흥 명문들까지 지역 명문교들은 야구를 교기로 삼아 경쟁했다. 학창 시절 야구에 열광했던 엘리트들은 모교의 야구를 지원했고, 역시 엘리트들이 장악한 언론계는 야구 대회를 열어 신문 판촉에 열을 올렸다. 1970년대 고교 야구의 흥행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프로 야구가 출범하는 데에도 엘리트들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미국 유학을 경험한 야구 명문교 출신 엘리트들은 정계와 재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유럽에 뿌리를 둔 축구보다 야구가 한 발 앞서 간 이유였다. 여기에 고교 야구를 통해 발산된 지역주의가 프로 야구에 그대로 이식되면서 야구는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가 됐다. 이렇게 탄생한 프로 야구는 1980년대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이는 다시 문화 자본이 되어 문화 엘리트들의 DNA에 새겨졌다. 이렇게 야구는 학연에서 시작해 정치, 경제, 미디어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다시 확대 재생산되면서 한국을 야구의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종성 교수의 《야구의 나라》는 스포츠가 단순히 자본이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이나 인도의 크리켓처럼 한국이 야구의 나라가 된 데에는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녹아 있다. 다른 모든 사회 분야처럼, 스포츠 역시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만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야구의 나라》는 스포츠 분야를 조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목차

프롤로그

 

PART I. 조선 야구 엘리트의 탄생

1. 일제 강점기 야구 독해법: ‘귀족 스포츠’ 또는 ‘일본 스포츠’

2. 고시엔 대회와 조선 엘리트 동화 정책

3. 조선 엘리트의 요람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야구를 이식한 일본

4. 내선융화의 롤 모델 상업학교의 야구 전통

5. 친일파와 지일파의 문화 자본이 된 야구

6. ‘귀족 학교’ 휘문고보의 고시엔 8강 진출의 비밀

7. ‘기울어진 운동장’의 서글픈 현실

8. 조선 야구 엘리트의 ‘먹고사니즘’

 

PART II. 해방 공간을 파고든 야구

1. 야큐(やきゅう)는 어떻게 베이스볼(baseball)이 되었나?

2. ‘학원 야구’의 열기와 야구 명문교의 등장

 

PART III. 한국 야구의 부스터: 재일 교포 선수와 은행 야구단

1. 재일 교포 학생 야구단 방문 경기에 투영된 정치

2. 북송 사업과 재일 교포 야구 선수

3. 박정희가 1963년 야구 한일전 승리에 기뻐했던 이유

4. 상업고 동문과 은행 야구 팀의 등장

5. 아시아야구대회와 은행 팀에서 빛난 재일 교포 선수들의 공헌

 

PART IV. 고교 야구 황금 시대

1. 고교 야구는 명문고의 경쟁 무대

2. 공화당은 왜 영호남 친선 야구 대회를 개최했나?

3. 상업고가 만든 야구 도시 군산과 마산

4. 구도(球都) 부산과 전파 월경

5. 신문사 주최 고교 야구 대회와 패자 부활전

6. 라디오와 TV를 지배한 고교 야구 중계

 

PART V. 프로 야구의 원형을 제시한 해외 교포

1. 프로 야구의 초석을 놓은 재미 교포 홍윤희

2. 재벌의 야구 팀 창단을 이끈 재일 교포 신격호

 

PART VI. 프로 야구 시대

1. 전두환 정권과 야구 민족주의

2. 프로 야구 출범에 영향을 준 청와대 수석들

3. 재벌이 프로 야구에 뛰어든 사연

4. 절정에 오른 야구 지역주의 (feat. 김대중·김영삼·김종필·노태우)

5. 해태 타이거즈의 전국 팬덤과 ‘전라도 엑소더스’

6. 한국 문화 엘리트들은 왜 야구를 사랑했을까?

7. 프로 야구의 중계권 잭팟과 WBC

 

에필로그

본문인용

일제 강점기 조선의 스포츠가 민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극일(克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구는 식민지 조선에 적합하지 않았다. 조선 민중들은 야구 경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팀이 결국에는 승리하는 야구 경기를 굳이 돈을 내고 지켜봐야 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야구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스포츠’로 치부됐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_PART I―1. 일제 강점기 야구 독해법: ‘귀족 스포츠’ 또는 ‘일본 스포츠’

 

당시 학생 야구 선수들은 값비싼 용품에 멋진 유니폼을 차려입고 경기를 치러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뭇 여성들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에서 학생 야구 선수는 매우 드물었다. 이들은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조선인들이 대부분인 시대에 선택받은 ‘야구 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_PART I―2. 고시엔 대회와 조선 엘리트 동화 정책

 

물론 공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1937년 기준으로 보면, 조선인 인구는 약 2,200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립고보와 사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을 모두 합쳐도 1만 5,454명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립고보를 통한 조선 사회의 야구 대중화는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수재들이 다녔던 공립고보의 야구 전통은 한국 사회에서 야구가 명문교의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줬다. 해방 이후 야구가 이들 학교의 교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_PART I―3. 조선 엘리트의 요람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야구를 이식한 일본

 

이들에게 야구는 조선에서 사회 특권층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문화 자본’이었다. 일본 유학파 엘리트들에게 야구는 선진 근대 문화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조선 민중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야구 실력에 관계없이 조선 사회에서 명사 대접을 받았다. 이 와중에 야구는 조선 사회에서 집안 좋고 학력도 높은 도련님들의 스포츠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적지 않은 일본 유학파 야구인들은 이후 정관계를 주름잡는 고위 인사가 됐다.

_PART I―5. 친일파와 지일파의 문화 자본이 된 야구

 

전원 조선인으로 구성된 휘문고보 야구부의 고시엔 대회 8강 진출 자체는 조선의 자존심을 세운 쾌거였다. 이를 가능케했던 힘은 엄청난 재력의 학교 설립자 민영휘와 일본 야구계가 인정했던 재능 박석윤에게서 나왔다. 조선 사람들은 휘문고보가 조선 예선에서 일본인 학교를 제압할 때 열성적인 응원을 했고, 대회 본선에는 재일 조선인들이 경기장에 몰려와 휘문고보의 선전에 환호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 조선 야구는 휘문고보처럼 친일 인사들의 후원과 지도하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야구를 잘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돈과 기술은 주로 이들에게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_PART I―6. ‘귀족 학교’ 휘문고보의 고시엔 8강 진출의 비밀

 

해방 공간에서 야구로 명문교의 지위를 획득한 경남중학의 사례는 이 시기 야구가 일제 강점기의 경험과 미군정 시대라는 특수성이 혼합돼 발전했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일본에서 선진 야구를 경험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일했던 장종기 감독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경남중학은 이 시기 최고의 야구 팀이 됐으며, 경남 지역과 부산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명문교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쌓게 됐다.

_PART II―2. ‘학원 야구’의 열기와 야구 명문교의 등장

 

한국 야구가 이룬 쾌거에 박정희 의장은 크게 기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과의 경기가 펼쳐지기 이틀 전 〈경향신문〉에는 박정희 의장이 한일 회담에서 일본 측의 입장을 상당히 반영하는 대신, 4,000만 원 상당의 수표를 일본 모 기업으로부터 수수했다는 의혹에 관한 기사가 1면 톱 기사로 실렸다. 대통령 선거가 보름 남짓 남았던 시점에서 보도된 이 기사 때문에 박정희 의장과 그의 측근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사실 관계를 떠나 가뜩이나 박정희 본인의 친일 문제가 대선을 앞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_PART III―3. 박정희가 1963년 야구 한일전 승리에 기뻐했던 이유

 

야구는 축구와 달랐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은행과 상업학교는 조선 야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있었던 상업학교나 일제가 설립한 은행에서는 야구 팀 육성에 관심이 지대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 20회 펼쳐진 고시엔 야구 대회 조선 예선에서 상업학교가 9회나 정상에 오른 것만 봐도 당시 상업학교 야구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_PART III―4. 상업고 동문과 은행 야구 팀의 등장

 

4대 일간지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고교 야구 대회 관련 기사를 한 달 전부터 끊임없이 양산했다. 이 시기에 고교 야구 대회 결승전 관련 보도는 4대 일간지 1면부터 크게 다루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스포츠와 관련된 갖가지 정보를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1970년대에는 고교 야구에 관련된 정보를 사실상 4대 일간지가 독점하고 있었다. 고교 야구 팀의 역사, 올해 전망이나 유망주 소개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4대 일간지를 봐야 했다.

_PART IV―5. 신문사 주최 고교 야구 대회와 패자 부활전

 

아시아 야구 대회는 야구 중계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이 대회는 한국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스포츠 중계 방송료가 책정된 대회였다. 대한야구협회는 이 대회의 각 경기마다 1만 원씩의 중계 방송료를 방송사에 청구했다. 당시 1만 원은 금 10돈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다.

_PART IV―6. 라디오와 TV를 지배한 고교 야구 중계

 

1960년대 말 롯데의 핵심 사업 분야는 추잉 껌이었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 무역 자유화 정책을 펴면서 미국 추잉 껌 제조 회사의 일본 진출이 가시화됐다. 미국 회사의 일본 진출은 롯데의 매출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었다. 나가타는 일본 진출을 노렸던 추잉 껌 제조사 리글리의 오너도 미국 프로 야구 팀 시카고 컵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신격호 회장은 나가타의 요청을 수락했다. 기시 전 총리는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을 통해 농림수산성에 압력을 가했고, 리글리의 일본 진출을 2년 뒤로 미뤘다.

_PART V―2. 재벌의 야구 팀 창단을 이끈 재일 교포 신격호

 

야구 명문교 출신 인사들의 학연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프로 스포츠 출범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이상주에게 프로 야구 창설의 주역이 되는 이호헌을 소개해 준 사람은 우병규 정무 제1수석이었다. 우병규 수석이 이호헌과 마산상고 동문으로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우 수석의 천거로 이상주 수석과 만나게 된 이호헌은 그의 서울대 상대 시절 동창생이자 군산상고 신화를 만들었던 이용일과 함께 프로 야구 창설 계획안을 작성하게 됐다. 프로 야구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학연의 힘은 이처럼 중요한 요소였다.

_PART VI―2. 프로 야구 출범에 영향을 준 청와대 수석들


 

프로 야구는 한국 프로 스포츠 가운데 중계권료 상승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리그다. 1982년 3억 원에서 출발한 프로 야구 중계권료는 2023년 현재 연간 760억 원으로 올랐다. TV 방송사가 지불하는 중계권료는 1년에 540억 원이며, 통신사와 인터넷 포털이 내는 유무선 중계권료는 한 시즌에 220억 원이다. 프로 축구, 프로 농구, 프로 배구의 한 시즌 중계권료를 모두 합쳐도 프로 야구 유무선 중계권료에도 미치지 못한다.

_PART VI―7. 프로 야구의 중계권 잭팟과 WBC

 

《야구의 나라》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학연’은 한국 주류 사회가 야구를 사랑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학연’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들의 ‘야구 동맹’은 해방 직후 청룡기 야구대회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은행단 야구 팀의 창단과 프로 야구 출범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1970년대 고교 야구의 전성기가 찾아온 이유도 학연이었다. 명문고 동문들이 후원했던 고교 야구는 곧 학교 담장을 넘어 지역 간의 경쟁으로 발전했고, 그 체제를 프로 야구가 그대로 이어받

아 한국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_에필로그

서평

한국 스포츠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보여 주는 가장 탁월한 저작

 

《야구의 나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왜 축구가 아닌,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됐을까? 2023년 현재, 프로 야구의 중계권료는 연간 760억 원이다. 그중 TV 방송사가 지불하는 중계권료는 연간 540억 원이고, 통신사와 인터넷 포털이 내는 유무선 중계권료는 220억 원이다. 축구, 농구, 배구 등 다른 프로 스포츠의 한 시즌 중계권료를 모두 합쳐도 프로 야구의 유무선 중계권료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압도적인 격차는 프로 야구가 대한민국 최고의 흥행 스포츠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야구가 이렇게 성공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야구는 태생적으로 국민 스포츠가 되기엔 불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족’ 스포츠는 누가 뭐라고 해도 축구다. 축구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을 꺾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반면 야구는 일본이 만든 엘리트 학교에서 행해지던 전형적인 ‘금수저’, ‘귀족’ 스포츠였다. 조선인들이 하기엔 진입 장벽이 높았고 일본과 대결해도 승산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사실 야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식민 지배로 인한 필연적인 열등감을 보여 주는 종목이었지만 야구를 잘한다는 건 모던 보이, 엘리트로 인정받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인의 스포츠인 야구로 일본을 누르면 그만큼 카타르시스도 컸다. 1923년 전원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휘문고보 야구 팀이 고시엔 본선 8강에까지 이르렀을 때 많은 조선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휘문을 응원했던 이유였다. 

해방 이후 야구는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미군정을 겪으면서 야구는 일본의 스포츠가 아닌 미국의 스포츠가 됐다. 이제 야구는 더 이상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됐다. 일제 강점기부터 만들어진 명문교들은 다시 야구를 통해 존재감을 알렸다. 엘리트 출신들이 주축이었던 신문사들은 앞다퉈 고교 야구 대회를 만들었다.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교들의 경쟁은 볼거리가 됐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주민’들에게는 향수를 달래 주었다. 

엘리트와 미디어의 관심은 야구를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 최초로 중계권료를 받은 시합은 1963년의 아시아 야구 대회였다. 반면 축구는 미디어의 외면 속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축구는 남북 대결 정도가 아니면 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야구는 학연에 기반한 엘리트와 미디어의 지원하에 이미 성공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에 지역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고교 야구 팀과 이를 계승하는 프로 야구 팀은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프로 스포츠의 기본인 지역 정체성을 가장 빨리, 그리고 깊이 뿌리 내린 야구가 한국 최고의 스포츠가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 야구의 성장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일본의 귀족 스포츠로 외면받다가 한국 최고의 스포츠가 되는 과정은 놀라운 역전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야구를 최고의 스포츠로 만들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이 과정들을 하나씩 따라가면 우리 사회가 보인다. 야구는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이 집약된 결정체다. 《야구의 나라》는 우리가 보기 어려웠던 사회의 이면을 야구라는 맥락을 통해 보여 준다. 이 흥미로운 과정을 함께하는 독자라면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깨닫고, 또 즐기는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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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종성
어릴 적부터 야구를 하는 것보다는 TV로 야구 중계를 보고 관련 기사를 읽는 걸 좋아했다.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는 동안 야구를 포함한 스포츠가 문화이며 한 시대를 반영하는 귀중한 타임캡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스포츠 문화사를 공부했다. 영국 레스터 소재의 드몽포트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늘도 신문과 잡지를 뒤적이며 한국의 대표적 야외 스포츠인 야구와 축구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는지를 추적 중이다. 저서로는 《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 c. 1910-2002: Development andDiffusion》(2016)과 《스포츠 문화사》(2014) 등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은 이 책의 출발점이 됐던 〈1970년대 고교 야구의 전국화와 지역주의에 관한 연구〉(201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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