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그런데 저 사람…… 낯이 익다. 혹시, 전설의 투수 장일봉? 익숙한 얼굴이 또 보였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미소년. 저 얼굴은…… 박철순? 비로소 기억이 났다. 내 인생은 망했고, 나는 이곳 1982년의 마운드로 끌려왔다. (9쪽)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공을 문질렀다. 오른손에는 몰래 침을 발라놓았다. 공에 침을 묻히면 움직임이 커져 스핏볼이 된다. 물론 현대 야구에서는 금지됐다. 하지만 여기는 프로의 세계.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게 중요하다. (16쪽)
“아니, 그래도 경남 씨가 잘 아실 것 같아서. 그 소문의 핵심으로 보이는 A 선수의 등판 기록을 보면 딱 그렇잖아요. 의심할 만하거든. 불펜에서 던지는 그 A 선수 이야기, 들으셨죠?” (27쪽)
리 코치는 “한국프로야구의 역사적인 시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슈퍼스타즈. 이곳은 정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막 시작되는 시대인 것 같았다. 그럼 정말 지금이 1982년이라는 말이겠지? (75쪽)
“자, 지금부터 에, 또, 저기 있는 곰과 눈싸움을 시작한다. 눈싸움에서 진 녀석들은 오늘 야간 훈련이다. 알겠나?” 리종근 코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선수들은 모두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눈싸움? 곰이랑? 저기 있는, 저 곰 말이지? (109쪽)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순간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물론 그동안 던졌던 마운드와는 조금 다르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배운 야구였다. 그리고 야구는 어디서나 똑같다. (132쪽)
발이 미끄러지면서 공을 놓쳤다. 아차. 뒤늦게 투구 자세를 잡아봤지만 이미 공은 손에서 떠난 뒤였고, 손을 떠나간 공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저 완전한 실투였다. (133쪽)
“〈부산 갈매기〉, 그거 어떻습니까?” 바로 다음 날부터 부산 야구장 응원석에선 〈부산 갈매기〉가 흘러나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저 노래가 이곳 부산 야구장을 가득 채울 날이 그려졌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꽤 짜릿했다. 미래를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162쪽)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 감독은 첫 타자 볼넷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226쪽)
그러고 보니 난 어젯밤 수지에게 모든 걸 말해버렸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이곳에선 그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현실에서 무언가 바뀐 게 있을까? 아니, 애초에 현실이란 어디지? 저곳? 혹은 이곳? (237쪽)
수지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수지도 나를 끌어안았다. 수지에게서 옅은 담배 냄새와 초콜릿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가 났다. 거기엔 왠지 그리운 것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같이. (271쪽)
“자넨 야구선수야. 어떻게 하면 빨리 회복해서 공을 던질지 에만 집중해. 그 외의 것엔 신경도 쓰지 마. 눈 감고, 귀 막고 살라고. 그게 어렵나?”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있었다. 도 회장은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하여간, 다들 조금만 잘해주면 빨갱이가 된다니까.” (309쪽)
야구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식이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다 불쑥 왼손으로 글러브를 쳐들었다. 그 안에 하얀 야구공이 보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슈퍼 캐치였다. (338쪽)
8회를 마쳤다. 후반기 우승을 노리는 베어스 타자들을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도 맞지 않았다. 노히트 노런. 이대로 경기를 마치면 그런 기록이 따라온다. 아직 한국프로야구에서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기록. (343쪽)
등번호 18번을 단 투수가 던진 공은 정확히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그 공은 그날 가장 빠른 공이었지만, 김우철은 그 공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외야를 향해 퍼올렸다. 하지만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은 공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마운드로 달려갔다. 마운드 위에 등번호 18번의 투수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죽은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동료들이 달려왔을 땐 이미 늦었다. (350쪽)
다음 날 그는 늦은 아침을 먹고 1982년의 프로야구를 검색했다. 그해 프로야구는 그가 원래 알던 것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슈퍼스타즈가 후반기 우승을 차지했고, 거기에는 괴물 투수 장일봉과 ‘써마린’이라고 불리던 신예 투수의 공이 컸다고 기록되었다. (353쪽)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장일봉에 대한 소식은 몇 년이 흐른 뒤 한 일본 지역신문에 단신이 실리면서 잠깐 화제에 올랐다. 기사에 따르면 장일봉 선수는 어떤 도박장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가 살던 단칸방 벽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