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전원 압도적 지지!
2024년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차별과 멸시 속에서 마주한 세계의 비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자란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장강명의 《표백》, 강화길의 《다른 사람》,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김희재의 《탱크》 등 1996년 제정되어 오랜 시간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한겨레문학상이 스물아홉 번째 수상작 《멜라닌》을 출간한다.
총 240편의 응모작 중에서 《멜라닌》은 유일하게 심사위원 전원의 지지를 받으며 최종심에 올랐다. 7인의 심사위원은 신중한 토론 끝에 “이민사의 굉장한 디테일” “매력적인 문장과 세련된 결말” “주인공 소년이 지닌 정감과 매력” 등을 이유로 《멜라닌》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수상자 하승민 작가는 IT와 금융업에 종사하다 2020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매일 8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3000자 쓰기를 과업으로 삼으며 치밀한 자료 조사와 취재를 병행한 끝에 한겨레문학상을 거머쥐었다.
《멜라닌》은 파란 피부로 태어난 한국 베트남 혼혈 소년이 미국 이민을 통해 디아스포라적 상황을 겪는 성장소설이다. 피부색과 인종으로 인해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취급되는 존재가 학교 친구와 선생님, 이웃들에게 일상적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 과정이 9·11테러, 총기 난사 사건, 한국 대통령 탄핵 등의 역사적 사건들과 촘촘하게 맞물리며 펼쳐진다. 자신을 아끼고 보호해주던 이들이 죽거나 멀리 떠나는 상실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소년의 분투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김금희 소설가는 《멜라닌》의 매력으로 “한 소년의 이야기를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세공하다가도 불현듯 꿈처럼 환상적이고 애틋해지는 장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다”는 점을 꼽았다.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멜라닌》이 “명백한 불행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인류를 기반으로 그들과 함께해야 할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라고 평했으며 편혜영 소설가는 “《멜라닌》을 통해 한국 소설은 차별과 혐오를 가리키는 인상적인 또 하나의 고유명사를 갖게 되었다”라고 상찬했다.
나는 호수 가장 깊은 곳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친다. 얼마나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지 시간을 재고 얼마나 깊이 잠수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 참았던 숨을 파, 하고 내지르면 검은 하늘에 별은 점점이 박혀 있고 하얀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클로이가 종이봉투에 담아 온 술을 한 모금, 셀마는 우리 사진을 찍으며 깔깔거린다. 사진 속 피부색을 무지개 색으로 바꿔본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의 피부색을 파란색으로 바꿔본다. 한 번 더 크게 깔깔거린다. _279쪽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첨예한 문제의식, 개성 넘치는 인물, 현실과 환상이 직조된 서사……
불평등의 역사로 핍진하게 그려낸 이방인의 성장담
《멜라닌》의 주인공 소년 재일은 어린 시절부터 파란 피부 탓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은근한 냉대와 이웃들의 노골적인 멸시 속에서 자라났다. 학교에서는 이름 대신 “아바타, 스머프, 도라에몽”“똥남아 튀기”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늘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재일에게 대차고 강직한 성격의 어머니는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새 빌라로 이사를 가던 날 윗집 부부가 “파란 피부가 어쩌네, 집값이 어쩌네” 하며 쑥덕거리자 어머니는 바로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두드린다.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랬던 어머니가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자 재일은 크게 상심한다. 난생처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경험에서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다.
한국은 어느덧 과거였다. 내가 소유한 유일한 세계는 조지아의 좁고 지저분한 아파트 속 작은 방 하나였다. 곰팡내를 풍기는 벽지와 기계 소리, 낯선 언어 사이에서 나는 뭍으로 올라온 해파리처럼 수축하고 있었다. _56쪽
그렇지만 외롭고 험난한 미국 생활에도 재일을 돕는 이들은 나타난다. 이렇다 할 능력도 없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아버지에게 선뜻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강우 삼촌과 셰인빌고등학교에서 만난 클로이, 셀마가 든든한 조력자이자 친구가 되어준다. 강우 삼촌은 세탁소 겸 세차장을 운영하며 재일을 친아들처럼 보살핀다. 재일에게 ‘제이’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고 미국 문화와 생활 방식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클로이는 백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파란 피부로, 학생들이 재일에게 거리를 두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말을 걸어온다. 셀마는 수업 시간에 ‘칭챙총’ 같은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재일을 돕는다. 이후로도 클로이와 셀마는 공격적인 혐오나 괴롭힘으로부터 재일을 보호한다. 셋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학교생활, 진로, 음악, 영화, 연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재일에게 평온한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안전하고 포근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와 같은 파란 피부, 내가 좋아하는 셀마 사이에 앉아 소속감을 만끽했다. 우리는 저녁이 될 때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지곤 했다. 들뜬 마음은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착 가라앉았다. 겨울을 앞둔 어느 저녁, 어두운 거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_121쪽
얼마 후 클로이는 미네소타로 이사를 간다. 셋은 예전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소통한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동안 클로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많은 글을 쓴다. 그중에는 파란 피부로서 자신의 느낀 차별적 시선, 재일이 경험했던 모욕에 대한 폭로도 있다. 그 내용이 일파만파 퍼지며 클로이는 유명세를 얻는다. “변혁을 꿈꾸는 십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에 반발심을 느낀 범죄자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다.
파란 피부, 살해, 용의자, 체포, 카니발리즘. 기사를 아래로 내리자 웃고 있는 클로이의 사진이 나왔다. 클로이의 블로그를 열었다. 새로운 댓글이 잔뜩 달려 있었다. 추모와 애도 사이에 간헐적인 조롱이 섞여 있었다. 까불더니 꼴좋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맛있으려나? 어떤 댓글은 초밥 이모티콘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_195쪽
재일은 클로이가 당한 일에서 쉬이 헤어나지 못한다. 같은 파란 피부로서 평생 이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던 중 강우 삼촌도 불의의 사건을 겪는다. 갱의 총격을 받아 치료를 받던 중 목숨을 잃는다. 셀마는 숲에 난 화재에 휘말려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른다. 그러자 재일은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을 제 탓으로 여긴다. 그동안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경멸과 야유를 떠올리며 삶에 대한 비관에 빠져드는 것이다. 과연 재일은 이러한 역경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나를 떠났다. 어떻게 그 모든 일이 셰인빌에서, 하필이면 내게, 융단폭격처럼 쏟아진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 피부색은 인간이 아닌 짐승의 것인지도. 나는 음흉하고 어두운 천성을 타고났을지도. 이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저주인지도. _277~278쪽
“나는 시스템과 싸워야 했다”
공동체의 미래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불행을 딛고 나아가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
《멜라닌》은 세상에서 가장 희소한 외형을 지닌 소년이 잔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잃지 않으며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소설이다. 폭력적이고 혹독한 “이 모든 시간을 겪어낸 제이가 마침내는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박서련 소설가) 이 과정에서 재일은 쉬이 도식화할 수 없는 고유한 매력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일방적인 구타와 조소에 움츠러들기만 하던 시기를 지나 증오가 제 영혼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나서서 행동하기에 이른다.
나는 더 이상 백인을 우러르지도, 흑인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선망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나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터와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 애국심과 규율로 무장한 벙커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_291쪽
문화 다양성과 인류 공영이 표방되고 있으나 정작 현실의 세계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해지는 추세이다. 이러한 와중에 파란 피부를 지닌 인간의 등장은 우리에게 소수자성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기후 재난과 국가 간 전쟁으로 인해 디아스포라가 점점 늘어나는 오늘날, 《멜라닌》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이민자와 그로 인한 계급 문제를 지극히 현실적인 에피소드와 환상적인 존재를 경유해 지적한다. 인종주의는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제약이자 불행임을 깨닫는 재일의 모습을 통해서 순진한 낭만 없이, 그럴듯한 낙관 없이 앞으로 우리가 함께 써나가야 할 공동체의 미래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응시한다. 이러한 분투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멜라닌》 이후 하승민 작가가 펼쳐나갈 작품 세계를 더욱 기대하도록 만든다.
탄생부터 이주민이자 이방인으로 규정지어진 주인공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첫 울음의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_김숨 소설가, ‘추천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