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농담처럼 몇 번이나 했을까. 고백하건대 나의 경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내가 나약해 서, 또는 내 삶이 유달리 팍팍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나 삶의 질곡 앞에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쏟아지는 과제에 휴학 버튼을 누르고 싶고, 몰아치는 업무에는 사직서를 내고 싶은 것처럼. 잘 익은 사과를 보면 한입 베어 물고 싶고, 노곤한 저녁 침대를 보면 눕고 싶은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_12p
여행을 준비하는 게 우울증 치료제가 됐다.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노르웨이의 협곡을, 이탈리아의 해안도로를 검색 했다.먼저 다녀온 이들의 여행기를 훑고 설렘에 잠 못 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도망자의 꿈이 머릿속에 넘실댔다. _13p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낯선 타인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에 섞이지 못한 채 나 홀로 부유하는 일이다.
이 평범하고 낯선 이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셈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_37p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 한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여기서 내가 누구인지는 나에게만 중요하고,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타인은 나에게 그저 타인일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그렇듯이. 나를 붙잡고 이렇게 살아라, 저런 사람이어야 한다, 침 튀기며 간섭했던 서울의 뭇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온 거였어.이 무리한 여행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게 됐다. _38p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여행을 자주 떠난다고 했다. 여행에 돈은 필요없기 때문에 가방 하나 만들고 무전여행을 다닌다. 이동은 히치하이킹으로, 음식은 인스턴트 라면으로, 숙박은 숲 속에서 침낭과 비닐텐트로. 너무 다른 삶을 사는 그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도 이상한 방식의 여행을 하는 나의 삶을 궁금해 했다. 그런 대화를 하며 우리는 친구가 됐다._55p
호수가 우리에게 허락한 평화는 단 하루에 불과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엄마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발길을 돌렸다. 사실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가족이 있는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이들 곁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 따로 혼자가 되고 싶은 마음.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선망 사이 갈팡질팡하는 어리숙한 마음들. 그렇더라도 여전히 나는 앞으로 가야 했다. 다시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_76p
나는 정말로 지루하고 싶었다. 지루할 정도로 스스로를 시베리아에 푹 담그고 싶었다. 시베리아의 풍광을, 드넓은 평야와 양옆으로 삐죽삐죽 뻗은 하얀 자작나무를, 소실점에위치한 하늘과 나 혼자 달리는 끝없는 도로를 지루해질 만큼 향유하고 싶었다. 더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가득히보고싶었다. _85p
모두가 하늘의 색이었다. 다 괜찮은 ‘하늘색’이었다. 또 는 그렇게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을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쯤 있는 이름 없는 색깔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저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명명되지 않는 무언가 를 하거나, 불리지 않는 누군가가 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길 역시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러시아의 어느 도로 한 가운데일 뿐이었다. _88p
때로 내면의 소란이 잠재워지지 않는 날이면 차를 몰고 아무 숲이나 찾아들어가 캠핑을 했다.
평온한 가운데 머리 위로는 별이, 발치에는 모닥불이 반짝이는 곳. 하루를 머무르면서도 숲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그저 어느 도로와 어느 도로가 마주치는 곳 근처라고 말할 수 있는, 지구의 가로선과 세로선으로만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곳. 고요와 무명의 축복이 그곳에 있었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그런 곳들을 나는 사랑했다._89p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묘하게 낭만적인 문구 위로 휘어진 무지개는 조금만 달려가면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위에 올라타면 다른 시간이나 다른 행성으로 도망쳐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불가능한 것은 알았지만 애초에 몽상이란 본래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너는 아직도 도망치고싶냐고, 몽상이 자꾸만 내게 물었다. _96p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 시점에 관뒀다. 바뀌는 것은 덧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결국 나는 어느것도 사랑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앞서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시계를 결국은 쳐다보지 않게 됐던 것처럼. 한편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 과거를 없애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변하지 않는 과거에 견디고 이해하고 적응하고 대화하며 용서했던 것들이 모두 나였다. 나날이 나아지는 중인 나였다._96p
여행자의 인연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으니 그게 마지막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아무렴 어떨까. 때때로 어떤 편지는 답신을 받지 못 할 것을 알면서도 붙잡아 손에 쥐어주고 싶은 것이니까. _1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