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지난 십여 년 동안 써온 글 중 일부가 책으로 엮어지게 되니 절로 지난날을 반추해 보게 된다. 목표를 정해 놓고 달려갔다기보다는 어찌 보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여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나름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나의 인생은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모든 예술가는 무릎을 꿇는 순간 그 값어치가 없어진다. 영혼의 세계, 순수의 가치 그리고 절대성에 대한 영역을 다루는데, 예술가가 쉽게 고개를 숙이면 감동을 줄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우니 우리 예술계 잘 좀 도와주세요.”라는 자세보다 우리 스스로 존재 의의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수예술은 지원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리고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우리부터 예술을 진정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 가치에 대한 확신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글 속에 녹여 넣으려 했다.
[책 속으로]
한국과 같은 예술 소비국가의 특징 중 하나는 관객의 눈높이가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관객의 선택은 언제나 옳지만 그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최고가 아니면 선택받지 못한다. 이런 살벌한 시장에서도 우리 예술가들은 살아남고 있다. 구미의 극장처럼 집약된 기능을 갖춘 시스템에서 일할 수 있는 터전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창작열은 식은 적이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그들을 존경하지 못할 때 그들은 더 이상 예술을 계속할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독일 역시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에는 재정적 압박이 존재한다. 이러한 위기가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이 꿈을 마음껏 펼 수 있는, 제작극장을 유지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칼스루에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예술가에 대한 한없는 존경. 이런 따뜻한 마음이 예술적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p. 22, ‘칼스루에 단상’ 중에서
서양 오케스트라는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악기별 독립적 연주와 더불어, 모든 악기를 망라한 교향악의 음향학적 합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국악관현악단 역사는 아직 일천한 편이다.
몇 년 전 독일 칼스루에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대구시 수성구와 칼스루에시와의 교류 협력차 두 명의 국악 연주자와 함께 독일을 방문했다. 당초 준비한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가 독일 관객에게 혹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일부의 우려가 있어서 황병기의 침향무와 비교하며 호텔방에서 두 곡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금 연주자의 곡도 함께 들었는데 지금껏 큰 무대에서 접하던 같은 연주자, 같은 곡이 매우 다르게 다가왔다.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음색·울림이 다가왔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라 할 만큼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국악의 매력을 재발견한 기분이었다. 소위 풍류방 음악이란 말처럼 우리 음악은 기계음향을 배제하고 아담한 공간에서 가까이 들을 때 제멋이 살아난다고 느꼈다.
-p. 45, ‘우리 음악의 지평을 향해’ 중에서
카잔차키스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했으나 조르바로부터 부정 당한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조금 더 길 뿐이오. 그것뿐이오.” 그리고 결국 고백한다. “나는 내 내부의 신성한 야만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았다. 나는 조리에 닿지 않는 고상한 행위를 포기한 것이었다. 나는 정중하고 차가운 논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었다.”
내가 결코 이런 ‘정중하고 차가운 논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의 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p. 70, ‘춤추는 조르바’ 중에서
LP음반 시대 거장들의 해석은 악보를 한 음 한 음 지속시키는 듯 여유로운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그 시대의 베토벤 〈운명〉은 연주 시간이 38분 정도 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네제-세갱의 연주는 32분에 불과했다. 반면 조르당의 해석은 네제-세갱의 해석보다 한결 여유롭다. 이를 두고 미국과 전통적인 해석을 중요시하는 유럽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일까?
네제-세갱은 미국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PO)를 지휘했다. 통상 특정 오케스트라마다 자동으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오먼디, 무티, 그리고 자발리시로 이어지는 빛나는 거장들에 의해 형성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이미지는 그 실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찬란한 필라델피아 사운드’로 각인되었다. 세갱에 의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지속되며 부드럽게 이어지는 현악기, 목관 악기들이 적절한 때에 돋보이는 것, 또 금관악기들과 나머지 악기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앙상블”이다.
세갱은 고전주의 작품을 다루어도 그 시대의 악기 주법을 의식하고 균형감을 중시하는 최근의 경향을 탈피해, 완급의 폭을 확대하고 과감한 드라이브로 끊임없이 질주한다는 평을 받는다. 과연 그랬다. 나로서는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몰아치는가 하면 서정적인 부분에서는 한없이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 놓기도 했다. 운동광이기도 한 그는 엄청난 에너지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모든 디테일을 계획하고 분석하여 열정적으로 몰아치다가도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게 음악을 어루만졌다.
-p. 71, ‘네제-세갱과 조르당’ 중에서
현존하는 피아니스트의 위대한 계보는 리스트의 레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평이다. 수많은 제자에게 마음을 다해 지도한 그는 자신의 기술을 흉내 내지 말라고 강조했다. 리스트는 학생들의 기술에 치우친 연주를 매우 싫어하며 그들에게 각자 자신만의 음악을 깨우쳐 주기 위해 애를 썼다 한다. 인간을 사랑한 그는 당연히 제자들에게도 그러했다. 자신의 제자라며 이름을 팔던 이가 사과를 하러 찾아오자 연주를 해보라고 한 뒤 온화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자네는 리스트의 제자라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해도 되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리스트와 함께한 순간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 감동을 간직한 채 살아갔다고 한다. 그를 유럽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 태어난 조국 헝가리 왕립 음악원의 창설과 운영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지금의 리스트 음악원이다.
-p. 84, ‘리스트를 아시나요’ 중에서
1992년 5월 27일 사라예보의 한 가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 순간 거기에 포탄이 떨어져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고 내전에 휩싸인 사라예보에서 많은 비극이 벌어졌지만, 특히나 이 사건에 충격과 슬픔을 느낀 한 사내가 다음 날 포탄이 떨어진 그 시각 오후 4시, 바로 그 장소에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22일간이나 연주를 계속했다. 그는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였다.
자원과 종교 그리고 민족 간의 갈등과 헤게모니 장악 등으로 근세에 와서도 수많은 비극적 전쟁이 있었다. 그중 유고내전은 우리에게 더 잔인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독한 전쟁 중에도 용기를 낸 한 사내의 연주로 인해 잠시나마 총성이 멈추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게 된다. 미국의 반전가수 존 바에즈는 이듬해 사라예보를 방문해 스마일로비치를 만나 국제적 주의를 환기시키고, 시민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작곡가 데이비드 와일드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 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1994 맨체스터 국제 첼로 페스티벌에서 세계적 연주자 요요 마에 의해 초연되었다. 조용히 시작된 곡은 죽음 직전의 한숨처럼 잦아들며 끝을 맺었다. 연주를 끝낸 요요 마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객석의 누군가를 가리키듯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그 사람,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마일로비치가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가 힘찬 포옹을 나누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 안은 두 사내를 향해 그제서야 모든 관객도 함께 감격의 눈물 속에 힘찬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접한 캐나다 출신 소설가 스티븐 갤러웨이는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다. 사라예보의 비극 가운데 꽃핀 용기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 일상이 죽음의 경계선이 되어버린 사라예보 시민들의 모습을 매우 리얼하게 담았다. 용기와 자존심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감동적 역사가 이 책 덕분에 온 세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아울러 한 음악이 많은 사람에게 더 깊이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가 비극의 현장에서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다.
-p. 110,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 속의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