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곱 살에 문(door)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대문자로 쓸 걸 그랬다. 이 문은 하얀 타일이 깔린 부엌으로 이어지거나 침실 벽장에 달린 지극히 평범한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일곱 살에 문(Door)을 발견했다. 보라. 이제 지면에서 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크고 당당하게 서 있는지. D의 둥그런 부분은 백색 공허로 이어지는 검은 아치문 같다. 이 단어를 보면 아마 여러분은 살짝 오싹할 정도의 익숙한 느낌에 목덜미 솜털이 곤두설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나무로 만든 이 노란 책상 앞에 앉은 나도, 책갈피를 찾는 독자처럼 책장을 휘리릭 넘기는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산들바람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 살갗을 구불구불 복잡하게 가로지르는 흉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조차 모를 것이다(내 이름은 재뉴어리 스칼러다. 이제 여러분도 나에 대해 조금은 알았을 테지만 대신 요점은 흐려졌다).
하지만 문(Door)이라는 단어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도 알 것이다. 어쩌면 그런 문을 직접 봤을 수도 있다. 오래된 교회의 반쯤 열린 썩은 문, 혹은 벽돌 벽 속에서 표면에 광택제를 발라 반짝이는 문. 만약 여러분이 상상력이 풍부해 자기도 모르게 두 발이 뜻밖의 장소로 데려가준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문을 통과해 아주 뜻밖의 장소에 가본 적도 있으리라. 아니면 평생 그런 문은 흘낏 본 적조차 없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예전과 다르게 그런 문이 많지 않다.
그래도 그런 문이 있다는 사실은 알 것이다. 안 그런가? 왜냐하면 세상에는 일만 개의 문에 얽힌 일만 개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는 자신의 이름처럼 그 이야기를 잘 알기 때문이다.
_본문 7~8쪽
발아래 밟히던 흙이 쓰러진 풀로 변했음을 깨달은 순간, 마구 휘돌던 두 다리가 멈췄다. 나는 웃자란 풀이 무성하고 인적 없는 들판에 서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어찌나 푸른지 아빠가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타일이 생각났다. 이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해서 내가 빠질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그런 하늘 아래로 녹 같은 적갈색 풀들이 물결쳤고, 드문드문 솟아 있는 삼 나무 몇 그루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 풍광이 만들어내는 느낌 ―햇볕을 받은 마른 삼나무의 진한 향, 오렌지색과 푸른색으로 이뤄진 암컷 호랑이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풀들― 때문에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메마른 나무줄기에 뚫린 구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사슴처럼. 나는 양손으로 야생 곡물 맨 위에 주름 장식처럼 달린 이삭들을 훑으며 더 깊은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문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원래 문은 그런 법이다. 누군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 반은 그늘에 잠긴 채 비스듬하게 서 있다.
이 문은 사실상 낡은 목재 문틀만 남아 있었는데 트럼프 카드로 집을 만들 때처럼 삼각형 모양이었다. 경첩과 못은 부식되어 거의 사라졌고, 그 주위에 녹슨 얼룩만 점점이 남아 있었다. 문 자체는 용감한 널빤지만 몇 장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벗겨진 페인트가 아직 문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하늘과 같은 감청색이었다.
당시 나는 이런 문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설사 여러분이 그걸 직접 목격한 자들의 보고서에 주석을 달아서 만든 세 권짜리 책을 주었다 해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_본문 17~18쪽
나는 그 소리를 따라 파라오 룸이라고 이름 붙은 2층 거실로 갔다. 로크 씨의 방대한 이집트 소장품이 보관된 방이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손궤, 날개 모양 손잡이가 달린 대리석 단지, 가죽 줄이 달린 황금색 작은 앙크 십자가, 무너진 신전에서 홀로 살아남은, 조각된 석조 기둥. 이 거실은 전체적으로 황금빛 광채가 감돌았다. 심지어 어스름한 여름밤에도.
그 소리는 거실 남쪽 구석, 아직 내 푸른색 보물 상자가 있는 곳에서 났다. 주추 위에서 상자가 덜커덕거렸다. 상자에서 수첩을 발견한 뒤로 나는 이따금 상자 주변을 돌면서 먼지 냄새가 나는 그 깊숙한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사지에 작은 나무 막대가 달린, 종이로 만든 꼭두각시가 들어 있었다. 이듬해 여름에는 러시아풍 왈츠가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뮤직 박스가 들어 있었다. 그다음에는 알록달록한 구슬이 달린 작은 갈색 피부의 인형, 그다음에는 삽화가 있는 프랑스판 《정글북》이 들어 있었다.
로크 씨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로크 씨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선물이 가장 필요한 시기, 이를테면 아빠가 또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든지 명절에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든지 할 때 딱 맞춰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말 없는 위로를 건네려고 내 어깨를 잡는 로크 씨의 어색한 손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로크 씨가 일부러 상자 안에 새를 숨겨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상자 뚜껑을 들어 올렸더니 마치 작은 대포에서 발사된 듯한, 회색과 황금색으로 이뤄진 무언가가 내 앞으로 튀어 올라 거실 벽을 스치며 날아다녔다. 깃털을 잔뜩 부풀린 연약한 새였다. 머리는 마멀레이드 색에 다리는 막대기처럼 길고 가늘었다. 나중에 그 새를 찾아보려 했지만 오듀본의 책에 비슷해 보이는 새는 없었다.
나는 상자 뚜껑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뚜껑이 떨어져 닫히는 순간, 그 안에 무언가가 더 있음을 깨달았다. 책이었다.
_본문 35~36쪽
분명한 사실은 별안간 내 몸이 차가워지며 부들부들 떨렸고, 내 옆의 배드가 살아 움직이는 가고일처럼 이를 번득이며 위로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내가 배드의 목걸이를 잡을 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헤이브마이어 씨가 분노에 사로잡혀 고음의 비명을 질렀고, 로크 씨는 뭐라 욕을 했다. 그러든 말든 배드는 헤이브마이어 씨의 다리를 입 안 가득 물고 으르릉거렸다. 그때 옆에서 다른 소리, 나직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 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소리라서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것은 제인의 웃음소리였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헤이브마이어 씨는 다리를 열일곱 바늘 꿰맸고, 독한 압생트를 네 잔이나 마신 다음 투숙하고 있던 호텔로 이송되었다. 배드는 ‘시간이 흐르는 한’ 내 방에 가둬두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로크 씨가 몬트리올로 출장을 떠날 때까지 3주 동안 그렇게 갇혀 있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로크 씨에게 손님에 대한 예의범절, 힘에 대한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얘야, 힘은 말이다, 언어란다. 또한 지형과 통화이기도 하면서 유감이지만 피부색이기도 해. 이건 네가 개인적으로 기분 나빠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야. 그냥 이 세상의 순리다. 이 사실에 빨리 적응할수록 좋아.”
로크 씨는 나를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초라하고 멍든 기분으로 서재에서 조용히 나왔다.
_본문 69~70쪽
소년은 어렸고 ―에이드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어릴 것이다― 팔다리가 길고 매끄러워 보였다. 모직 천을 이상한 방식으로 걸치고 있었는데 천을 늘어뜨리거나 접어 정교한 곡선 주름을 잡은 게 특이했다. 마치 배의 돛을 훔쳐 몸에 둘둘 감은 듯이. 소년의 이목구비는 가늘고 섬세했으며 눈동자는 검고 맑았다.
소년이 다시 입을 열자 여러 음절로 된 일련의 말들이 거의 질문과 같은 형태로 배열되었다. 에이드는 그 말이 유령과 악마들만 아는 지옥의 방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단어들이 바뀌더니 익숙한 모음들이 제대로 된 문장을 형성했다. “실례지만 뭐라고 했죠, 아가씨? 내 말 알아듣겠어요?” 소년의 억양은 매우 기이했지만 일부러 신경 써서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하는 듯했다. 마치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두렵다는 듯이.
그 순간 에이드는 리지 고모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문이라는 매체는 순전히 종이 낭비일 뿐이었다. 놀란 눈에 침대 시트로 만든 것 같은 옷을 입고 부드럽고 조심스레 말하는 이 소년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알아들어요.” 에이드가 대답했다.
소년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손으로 웃자란 풀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을 찌르는 뻣뻣한 감촉에 놀라더니 이번에는 손바닥이 하얀 손을 들어 올려 에이드의 광대뼈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둘 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상대가 피와 살이 있는 진짜 인간일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소년의 부드러운 태도와 순수하게 놀란 표정, 기다랗고 고운 손을 접한 에이드는 갑자기 경계심을 늦췄다.
“넌 누구니? 어디에서 왔어?” 만약 유령이라면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소년은 적합한 어휘를 찾아내려고 더는 사용하지 않는 기억 속 벽장을 뒤지는 듯했다. “난 다른 곳에서 왔어. 여기 살지 않아. 벽에 있는 문을 통해 여기에 왔어.” 그는 뒤돌아서 다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의 기울어진 현관문을 가리켰다.
_본문 89~90쪽
머릿속에서 은색 눈을 가진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였다. ‘착한 소녀가 되어야지. 네 분수를 알아야 해.’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내 핏속에서 쿵쿵거리는 술기운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가 왜 협회에 가입해야 하죠? 까다로운 상류층 늙은이들이 자기보다 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해외로 내보내 물건을 훔쳐 오라고 자금을 지원하는 모임일 뿐이잖아요.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라져도 슬퍼하는 척도 하지 않고 모임은 계속되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사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멈췄다.
다들 망연자실해 방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지자 나는 새삼 집에서 나는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다. 대형 괘종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 가벼운 여름 바람이 창유리에 대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 백 켤레의 고급 구두 무게에 마룻널을 받치고 있던 장선이 신음하는 소리. 나는 배드의 목걸이를 잡았다. 마치 통제가 필요한 쪽은 배드라는 듯이.
로크 씨의 손이 내 어깨를 꽉 잡았고, 평소 너그럽기 그지없던 그의 미소가 고통스레 이를 악문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과해라.” 그가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나는 턱이 굳어버린 듯했다. 내 일부, 그러니까 로크 씨의 착한 아이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분수를 알고 늘 웃기만 하던 소녀는 그의 발아래로 몸을 내던지며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크 씨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강철빛 서늘한 눈길이 내 얼굴을 붙잡은 차가운 손처럼 나를 내리눌렀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협회 회원 하나가 조롱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로크 씨가 턱의 힘을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뉴어리, 우리 협회는 역사와 전통이 유구하고, 영향력이 막강하며 아주 명망 있는…….”
_본문 129~130쪽
다시 도망치고 싶었다. 유령 소년을 찾아 헤매는 에이드의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이드는 실낱같이 가늘고,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은 희망을 품고 유령 소년을 찾느라 그 많은 세월을 보냈다.
만약 그녀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직접 아빠를 찾아 나섰을 거야.’ 남부 억양이 들어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만약 에이드가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대답이 머릿속에서 또렷하고 강하게 울렸다. 마치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듯이.
‘나가서 아빠를 찾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던 내 가슴 위로 위험한 전율이 갑작스러운 열기처럼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어른스럽고 냉철한 목소리가 《일만 개의 문》은 그저 소설일 뿐이며 소설은 믿을 수 없는 조언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소설은 합리성이나 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저 비극과 서스펜스, 혼돈과 규칙 위반, 광기와 상심을 팔며 우리를 그런 쪽으로 몰고 간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쥐들을 꼬여내 강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간교한 속임수로.
그냥 여기에 남아 어젯밤 내가 저지른 망발에 대해 로크 씨의 자비를 구하고, 어린아이 같은 꿈들일랑 원래 자리에 가둬두는 편이 더 현명할 수도 있다. ‘약속하마’라고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나직하고 진정성 있게 들렸다는 사실은 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빠는 끝내 날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날 구해주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만약 내가 용감하고 만용을 부리고 아주 어리석다면, 만약 내가 가슴에서 들리는 그 담담하고 두려움 없는 목소리, 너무도 익숙하면서 너무도 이상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부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_본문 172~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