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p. 35
“세계는 나의 표상(Vorstellung)이다.” 이것은 살아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이러한 진리를 반성적으로,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데, 인간이 이것을 진정으로 의식한다고 하면 그는 분별력(Besonnenheit)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가 아는 것은 태양과 땅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 그리고 대지를 느끼는 손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단지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세계가 오로지 완전히 다른 존재, 즉 인간 자신인 표상하는 자(das Vorstellende)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고 확실해질 것이다.
p. 63
이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기꺼이 마법이나 기적을 믿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약속된 연관성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속거나 음모에 넘어간다. 어리석은 사람은 주어진 충고와 진술된 판단 등등의 숨겨진 동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항상 인과법칙을 예리하고, 신속하게, 쉽게 사용하는 것, 즉 오성의 힘뿐이다.
p. 104
이런 점에서 앎의 직접적인 반대는 감정(Gefühl)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감정에 대해 설명해야만 한다. 감정이라는 단어가 표시하는 개념은 전적으로 단지 소극적인(negativ) 내용, 즉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는, 즉 이성의 추상적인 인식이 아니라는 내용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인식 이외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감정이라는 개념에 속하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감정이라는 개념의 지나치게 넓은 영역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질적인 것들이 오로지 이러한 소극적인 점에서만, 즉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서만 일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주 상이하고 적대적인 요소들이 감정이라는 개념 속에서는 평온하게 서로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이다.
p. 165
우리는 1권에서 표상을 단지 그 자체로, 따라서 단지 일반적인 형식에 따라 고찰하였다. 개념, 즉 추상적인 표상은 직관적인 표상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내용과 의미를 갖는 한에서 그 내용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추상적인 표상은 이러한 직관적인 표상 없이는 그 가치나 내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직관적인 표상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직관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직관의 내용과 보다 상세한 규정들 그리고 형태를 알게 된다. 특히 우리에게는, 그러한 직관의 지각된 의미와는 다른 직관의 본래적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해명을 통해 이러한 형상들(Bilder)이 완전히 낯설고 아무런 의미 없이 우리를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이해되며 우리의 전 존재가 흥미를 갖게 한다.
p. 211
우리는 다수성이 보통 시간과 공간을 통해 필연적으로 제약되고 오로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각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개체화원리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근거율의 형태로 인식하고, 이러한 근거율 속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이 선험적으로 표현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은, 위에서 논의했듯이 그 자체로는 사물들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물들의 인식가능성, 즉 물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인식형식일 뿐이다. 물자체는 그 자체로 인식의 모든 형식으로부터, 또한 가장 보편적인 인식으로부터, 주관에 대해 객관으로 있음(Objektsein)이라는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즉 표상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p. 286
따라서 학문이라는 이름을 공통으로 갖는 이 모든 것들은 다양한 형태의 근거율을 따르고, 학문의 주제는 현상, 현상의 법칙들, 연관 그리고 여기에서 생기는 관계들이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밖에서 존재하는 것, 즉 본래 세계의 본질, 세계의 현상들의 참된 내용, 그 어떤 변화에도 종속되지 않기에 항상 동일한 진리로 인식되는 것,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자체, 즉 의지의 직접적이고 적절한 객관성인 이념들을 고찰하는 것은 어떤 인식방식인가? 그것은 천재의 작업인 예술(Kunst)이다. 예술은 순수한 관조를 통해 파악된 영원한 이념들, 즉 세계의 모든 현상의 본질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을 재현하고, 이념들이 재현되는 재료에 따라 예
술은 조형예술, 시, 음악이 된다. 예술의 유일한 근원은 이념의 인식이다.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이러한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p. 388
따라서 다른 예술은 모두 단지 간접적으로, 즉 이념을 수단으로 의지를 객관화한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는 개체화원리(개체 그 자체에게 가능한 인식의 형식)에 관계하여 다양성으로 여러 이념이 현상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은 이념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현상하는 세계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며, 현상하는 세계를 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음악은 세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예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음악은 세계 자체가 그런 것처럼, 다양하게 현상하여 개별 사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여느 이념들이 그렇듯이, 전체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이고 모사인 것이다. 따라서 음악은 결코 다른 예술처럼 이념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모사이고, 이러한 의지의 객관성이 이념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악의 영향은 다른 예술들의 영향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예술은 그림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지만 음악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p. 494
그러나 의지는 자기 신체의 자기긍정을 수많은 개체들에서 나란히 드러내면서, 의지는 모두에게 있어 고유한 이기주의 덕분에 어떤 개체에서는 아주 쉽게 이러한 긍정을 넘어 다른 개체에게서 현상하는 동일한 의지를 부정할 수 있게 된다. 전자의 의지는 다른 사람의 의지긍정의 경계를 침범하여, 개체가 다른 신체 자체를 파괴하거나 부상을 입히거나 또는 다른 신체 자체에서 현상하는 의지에 봉사하는 대신에 다른 신체의 힘을 자신의 의지에 봉사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개체가 다른 신체로 현상하는 의지로부터 이러한 신체의 힘을 빼앗아 버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에 봉사하는 힘을 자신의 고유한 신체가 지닌 힘을 넘어 증가시키며, 따라서 다른 신체에서 현상하는 의지를 부정함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신체를 넘어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긍정하게 된다. 다른 개체의 의지긍정의 경계를 침범하는 것은 이전부터 분명하게 인식되어 왔는데, 이러한 침범이라는 개념은 부당함(Unrecht)이라는 말로 일컬어져 왔다. 왜냐하면 침입하는 사람과 침입당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우리처럼 분명하게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감정으로서, 순간적으로 그러한 사태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부당함을 당하게 된 사람은 다른 개체에 의해 자신의 신체가 부정당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신체의 긍정의 영역으로 침범해 오는 것을 직접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느끼게 된다.
p. 602
우리 앞에는 오직 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로 사라져 버리는 것에 저항하는 것, 즉 우리의 본성이 바로 살려는 의지이며, 이러한 살려는 의지가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세계이다. 우리가 그다지도 무를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그같이 삶을 의욕하고 있고, 이러한 의지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의지 이외에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궁핍과 난처함으로부터 세계를 극복한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면, 끝없는 충동과 노력 대신에, 소망에서 두려움으로 그리고 기쁨에서 고통으로의 지속적인 이행 대신에, 의욕하는 사람의 삶의 꿈을 만족시키려는 결코 충족되지 않고, 결코 소멸하지 않는 희망 대신에, 모든 이성보다 고차원적인 평화, 큰 바다와 같은 완전한 마음의 고요, 깊은 평온,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명랑함이 나타나게 된다. 세계를 극복한 사람에게서 의지는 우리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사실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하고,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며,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부정하고, 그런 후에 오직 의지의 마지막 자취가 그를 생기 있게 하는 신체와 함께 소멸하는 것을 보려고 기다린다.
p. 628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무의 경험을 인도인들은 브라흐마로 합일한다거나 불교도는 니르바나에 도달한다고 말하는데, 진정한 종교에서 말하는 성자들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