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종교, 철학은 절대이념을 인식하는 절대정신의 형태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즉 예술은 절대이념을 감각으로 직관(Anschauung)하고, 종교는 내면으로 표상(Vorstellung)하며, 철학은 개념으로 사유(Denken)한다. 헤겔은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절대정신의 형식들 사이에서도 변증법적 이행의 관계가 작동한다고 본다. 즉 감각적 직관 방식보다는 표상이, 표상보다는 사유가 절대이념을 보다 더 충전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이념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예술, 종교, 철학의 위계는 분명하다. 이러한 헤겔의 생각은 《미학강의》에 그대로 유지된다.  ̄ 37쪽
니체가 그리스의 예술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삶과 세계의 정당화를 위한 것, 즉 종교나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것이다. 초기 니체가 그리스의 예술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본 점은 헤겔과 매우 유사하다. 헤겔이 그리스의 조각에서 '예술종교'를 목격했다면, 니체는 비극에서 그것을 확인한다. 비극에서 보여주는 가상은 현재의 삶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니체의 이러한 해석은 바그너의 총체극(Gesamt-Kunst)의 이념을 그리스 비극이 지향하는 목표로 이해한 성급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의 〈자기비판을 위한 서문〉에서 “나는 당시 가장 현재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첫 번째 책을 망쳤는데, 이 현재적인 것에 대한 너무 성급한 희망과 잘못된 응용들”이 그 원인이었다고 고백한다.  ̄ 69쪽
사진이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박탈하고 예술작품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두고 소유하려는 개인의 욕망을 현실화시켰다면, 영화는 기술적으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집단적 향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아우라의 붕괴를 완성한 예술이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 초기 이론가들은 사진과 영화에서 여전히 제의적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초기 사진이 초상화를 대체한 것에서 그리고 초기 무성영화에서 종교적, 초자연적인 것을 구현하고 찾으려는 것에서 그러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벤야민은 이러한 태도를 기술복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기술의 진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함”으로 비판한다.  ̄ 141쪽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동반되는 대표적인 감정(정동)이 도취이다. 도취의 감정이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도취는 창조의 과정에서 자신이 온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는 강력한 암시 속에서 결과의 평가와 무관하게 행위를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도취가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조형Schaffen하려는 감흥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도취의 감정은 근본적으로 신체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눈이 있기에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고 도취하여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의식과 관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이차적인 것이다. 모든 예술 행위의 동력은 도취이고 도취는 몸에서 비롯된 수많은 정동 중의 하나이다. 니체가 예술을 형이상학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생리학의 차원으로 이해한 것은 그의 몸(Leib)에 대한 통찰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 231쪽
들뢰즈의 예술철학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분석한 《감각의 논리(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1981)에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에서 감각의 논리는 힘(force)이 신체(corp)에 일으키는 파동과 관계하고 회화는 이 힘의 파동을 그리는 것이고, 음악은 이 힘의 파동을 들려주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형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그리고 들려주는 것이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 힘과 감각의 문제는 이미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Différnce et Répétition)》(1968)에서도 상론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표방하는 과제는 '차이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볼 때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를 지배한 것은 동일성(identité)과 재현(représentation)이다. 동일성은 이데아와 존재, 실체 그리고 신 등의 이름으로 철학사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진리와 가치의 원본의 역할을 한다. 원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허상과 모순으로 취급되었고,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 291쪽
니체가 놀이에 서툰 자 혹은 '지체가 높은 자'로 비꼬는 형이상학자 혹은 도덕군자들은 웃음, 놀이, 춤을 모른다. 왜냐하면 “웃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고, 삶 속의 고통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노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고, 우연의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추는 것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웃음, 놀이, 춤은 가치 전환의 힘, 즉 니힐리즘을 전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놀이는 필연을 우연으로,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킨다. 이 모든 것은 또다시 사지가 찢어진 디오니소스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 331쪽
들뢰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는 차이를 철학의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결정적 잘못은 차이 자체를 사유하기보다는 차이를 개념 안으로 편입시켜 사유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차이의 개념을 개념의 차이로 오해한 것이다. 차이를 개념의 차이로 오도한 결정적 잘못은 재현의 능력을 과신한 것이다. 재현은 차이를 '동일성, 유비, 대립, 유사성의 네 가지 끈으로 묶어 개념 안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존재는 결코 개념으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일의성', 즉 하나의 독특한 목소리를 갖는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 단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의 아우성을 이룬다.”  ̄ 346~347
디지털예술의 미적 체험은 전통적 미적 체험의 범주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치를 폐기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는 디지털예술작품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성의 약화를 넘어 작가의 죽음을 목격한다. 디지털예술작품은 한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공동의 작업으로 시작하여 익명의 인간들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상황은 니체가 '미래예술'의 이름으로 예언한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된다'는 언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독일의 매체 이론가인 노르베르트 볼츠(N. Bolz)는 오늘날 예술의 가치가 관조에서 놀이로 완전히 넘어갔다고 단언한다. 그는 예술에게 사회비판적이고, 진리를 드러내고,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예술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 44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