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세기에 걸쳐 기울인 노력 끝에 인류는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신의 개입 없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생명체를 연결 짓는 요소인 데옥시리보핵산, 즉 DNA다. 미국 국립인간유전체연구소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체(또는 DNA)는 단일 세포에서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내는 모든 지시 사항을 담은 운용 설명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유전자가 관련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전자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인지는 답하기 어렵다.
세간에 알려진 상식이 어떻든 유전자의 원리와 역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전체에 인류 및 다른 생명체의 ‘운용 설명서’가 있다는 주장에 나는 의구심이 생긴다. 유기체의 생성 과정을 알아가는 데 있어 사람들이 그동안 간과하다 못 해 잊다시피 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세포’가 바로 그것이다.
-7쪽
우리가 세포이고, 세포가 곧 우리지만, 세포핵 안에 있는 그 유명한 이중나선 구조와 달리 세포 자체는 유전자의 역할을 지원하는 존재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화 작용을 수행하고, 심장과 뇌의 작용을 유지하며, 감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가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주체는 유전자가 아니라 세포다. 단조로운 DNA 구조와 달리 세포는 다양한 내부 조직으로 인해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다양성과 구성 요소의 여러 가지 조합 덕분에 세포가 모양과 형태를 만드는 주체로서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세포가 유전자를 제어해 유기체를 만드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포 내부의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77쪽
진화생물학자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도킨스는 생명에 관해 논할 때 유전자에서 유기체와 그 활동에 이르는 개념들이 서로 교체 가능하다는 듯이 이 개념들 사이를 매끄럽게 이동한다. 동물은 자손을 돌보고 인간이 서로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유전체 내 개별 유전자가 한 세대라도 더 이어갈 가능성을 극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기체가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 방식이 주변 환경에 합리적이거나,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계되었거나, 자체에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이유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세포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명에 관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다.
-145쪽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유전자만으로는 지느러미가 지느러미발, 손, 발, 날개로 진화한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도구 목록에 변화가 생겨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이 열리지만, 어떤 새로운 도구를 보관하고 사용할지, 어떤 도구를 버릴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포다.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전에 세포는 자체를 위한 선택을 한다.
-154쪽
나는 세포가 영원히 살 수 없다고 언급할 때 ‘정상 세포’라고 한정했다.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불멸할 수 있는 세포 유형이 하나 있다. 바로 암세포다.
앞서 동물 세포와 유전체 간의 파우스트식 합의를 살펴본 바 있다. 세포가 생식세포인 난자와 정자를 통해 유전체를 다음 세대에 온전하게 전달하는 한, 세포는 유기체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유전체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따. 생식세포가 일상생활의 위해 요소로부터 유전체를 보호하는 벙커 역할을 하며, 유전체는 세포가 발달하고 우리 몸이 기능하는 동안 세포가 유전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는 합의다. 하지만 유전체가 끊임없이 세포를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이 합의는 자칫 깨질 수 있다. 결국 유전체가 세포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 이제 암이 신체를 장악한다.
-295쪽
2022년 8월, 과학자들이 배아줄기세포로 완전한 쥐 배아, 더 정확히는 합성 배아에 아주 가까운 구조를 생성했다는 발표와 함께 인류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 구조는 불완전하고 드물게 발생하지만, 앞서 내가 설명한 정의에 따르면 배아와 아주 비슷하다. 이 합성 배아는 쥐 세포로 만들어졌지만, 향후 몇 년 안에 인간 배아줄기세포로 같은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중대한 순간이 될 것이고, 우리는 이런 실험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미리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합성 배아는 인간의 장배 형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식을 위한 장기 및 조직 대용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 경우 대안이 없을 때만 취해야 한다는 특별한 결정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대안이 존재하는 것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381쪽
인류는 이제 막 세포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기 시작했고, 세포를 재창조하며 세포에 관한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고 있다. 세포는 이제 우리가 학교와 대학에서 세포학 수업 시간에 배웠던 다양한 이름의 정적 구조가 아닌 학습하고, 움직이며, 계산하고,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며,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갖춘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창의적인 개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장배 형성 과정과 세포가 유전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과 관계없이 배양 환경에서 조직과 장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세포와 소통하며 세포의 능력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우리는 세포가 유기체 형성에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화학적, 기계적 신호인 세포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세포로 발현되는 유전자를 분류하기는 하지만, DNA가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바코드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유전자의 발현은 세포의 바코드가 된다.
-4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