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7 니체는 자신의 글이 곱씹어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바람 이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나요? 오히려 세상은 니체의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변화한 것 같지 않나요? 되새김질의 읽기는 니체의 시대에도 “까마득하게 잊힌” 것이었는데, 21세기에는 훨씬 더 깊은 망각 속에 빠져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더 많이 더 빨리 정보를 얻으려 몹시 애쓰고 있습니다.
p. 60 “카더라”는 “하더라”의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하더라”는 “누구가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에서 나온 표현으로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유행어는 이 표현에서 “누구가 무엇이라고 말했다고”라는 부분이 빠진 나머지입니다. … 그러므로 카더라 통신은 잡담과 마찬가지로 그 말해지는 대상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다. 아예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카더라 통신의 소문은 미디어 등을 통해 순식간에 사회 전체로 퍼지고,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럼으로써 그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로 믿어지고 어마어마한 권위를 얻게 되지요.
pp. 110-111 여러분, 러셀이 제안한 워라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처럼 “게으른” 사회에서 흔쾌히 살고 싶나요? 아니면 모두가 일해야 할 시간에 노닐기 때문에 사회에 발전이 없고 인류 문명이 퇴보할까 봐 걱정되나요?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러셀은 1퍼센트의 소수에 관해 말합니다. 인류의 99퍼센트는 사회의 발전과 무관한 방향으로 그들의 여가를 쓸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1퍼센트의 사람들은 그들의 여가를 무언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에 바칠 것이라고 러셀은 믿습니다.
p. 148 한 문장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것입니다. “삶에 대한 절망이 없다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마치 사람이 절망하고 나면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어느 날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합니다. 하지만 절망 가운데서도 계속 살아가지요. 그러면서 그 사람은 느낍니다. “아, 내가 삶을 사랑하고 있구나.”
p. 157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에 쉽게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부부나 연인은 서로에 대해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고 자주 싸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도리어 그 무한 반복으로 인해 사랑이 메마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점을 야스퍼스도 모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새롭게” 샘솟는다고도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