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경제의 세기
에릭 홉스봄은 1914년의 1차 대전부터 1991년 소련의 몰락까지를 현실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세계를 뒤흔든 ‘단기 20세기’로 규정한다. 이와 달리 들롱은 1870년부터 2010년까지, 즉 인류를 극심한 빈곤에 가두었던 문을 여는 데 성공한 이후부터 이 성공이 가져온 부의 급격한 상승 궤적의 속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기까지의 시기를 ‘장기 20세기’로 규정한다.
1870년 이전에는 기술이 인구 증가와의 속도 경쟁에서 번번이 패배하며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지, 지붕도 없는 곳에서 벌벌 떨어야 하지 않을지를 걱정해야 했다. 즉 맬서스 함정이 작동했고, 맬서스가 옳았다. 실제로 1870년대 초반 존 스튜어트 밀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기계적 발명으로 과연 고된 하루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이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상황은 1870년 무렵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조직과 제도와 기술(기업 연구소, 근대적 대기업, 세계화 등)을 갖추며 그전까지 인류를 지독한 가난에 가두었던 문을 열어젖혔다. 인류 경제성장의 핵심인 (자연을 조작하고 인간을 조직하는 것에 관한) 유용한 아이디어의 축적물(총요소생산성)의 세계 평균 성장률은 1870년 이전에는 연 0.45%였는데, 1870년 이후에는 연 2.1%로 높아졌다. 그 결과 1870년 대비 140년 동안 21.5배 증가하였고, 인구 증가에 따른 효과 등을 감안하면 인류는 8.8배 더 잘살게 되었다.
하이에크와 폴라니의 결투,
케인스의 축복을 받은 이들의 강제 결혼과 ‘영광의 30년’
타임머신을 타고 1870년으로 돌아가서 당시 사람들에게 2010년의 세상을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유토피아라고 생각할 것이 확실하다. 8.8배 더 잘살게 되었다면, 자연을 조작하고 인간을 조직하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물질적 풍요 속에서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였다. 인류는 유토피아에 도달하기는커녕 이제 그 길 위에 있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경제성장은 무엇보다 시장경제에 의해 매개되었다. 하이에크는 시장만이 성장의 과업을 이룰 수 있으며, 인간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자체 논리를 가진 시장 시스템의 작동에 믿음을 가지라고 인류에게 명령했다. 즉 ‘주신 분도 시장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시장이시니. 시장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한 셈이다.
인류는 이를 거부했다. 시장경제는 1차 대전 직전까지 북방세계를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지만, 극심한 불평등과 혼란도 함께 나타났다. 장기 20세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타나고 격돌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레닌의 현실사회주의가 등장했고, 이들의 실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최악의 재앙으로 끝났다.
폴라니는 사회정의는 잊어버려야 한다던 하이에크와 달리 사람들은 스스로 재산권 이외의 다른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도 경청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을 가져야 하며, 사회는 마땅히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기 20세기 내내 사람들은 시장경제가 가져온 것을 보며 다른 무언가를 요구했다.
시장의 능력에 대한 하이에크의 비전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먼저 시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했다. 둘째로 케인스의 아이디어가 중요했는데, 시장경제는 기업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출이 있을 경우에만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사회 전체의 지출이 부족한데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방임의 사상이 가져온 결과가 바로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은 자유방임 시스템에서 왼쪽의 좀 더 관리되는 ‘혼합’경제로 이동하는 데에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혼합경제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는 고상한 사회주의의 목표와 확연히 달랐다. 대신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소득을 재분배하기 위해 소득 부조와 누진세를 제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필수품을 모두 공공이 제공하는 고도의 사회주의 체제는 비효율적일 수 있었지만, 소득을 단지 좀 더 평등한 방식으로 분배하는 사민주의 시스템은 이를 궁핍한 이들에게만 제공하고 시장의 마법과도 같은 힘을 사회적 목표에 활용함으로써 낭비를 피해 갔다. 이렇게 케인스의 축복 아래 강제로 폴라니와 결혼함으로써(세 번째 조건을 충족하며) 하이에크의 비전은 현실화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급속한 성장과 상대적으로 평등한 분배를 달성한 전후 ‘영광의 30년’이었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빠른 성장과 균등한 분배를 달성한 사회민주주의는 강력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스스로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발호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동등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일부 시민은 자기들은 출생, 교육, 피부색, 종교, 그 밖의 특징들로 인해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욱 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용 수준이 높고 성장이 강력한 동안에는 이 딜레마가 덮어질 수 있지만, 성장이 둔화되고 고용이 줄면 갈등이 증폭된다. 이것이 사민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온 기본적인 배경이었다.
여기에 더해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 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린든 존슨 정부 후반부터 슬금슬금 올라가던 물가는 닉슨이 취임하던 1969년 5%에 이른다. 이어 1973년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오일 쇼크가 찾아왔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인플레이션은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정부는 당연히 무능한 정부이다. 1970년대 후반에 사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인플레이션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묻기만 하면 됐다. ‘제대로 기능하는 시스템이라면 이런 일을 초래했을까?’ 답은 당연히 ‘노’였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로의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졌고, 레이건과 대처는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했다. 흥미롭게도 레이건과 대처 모두 실업과 빈곤이라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플레이션 종식을 제외하면, 그들의 국내 정책은 실패했고 사민주의보다 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규제를 철폐하여 고용과 임금수준을 올리려고 했고, 부자들의 세금을 낮춰 투자, 기업 활동, 성장을 촉진하려고 했으며, 감세를 통해 정부지출과 정부 규모를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임금은 다시 빠르게 상승하지 않았고, 투자와 성장 모두 가속도가 붙지 않았으며, 정부는 축소가 아니라 (대대적인 군비 증강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에서는 그때까지 있다 해도 한두 해 정도에 그쳤던 큰 폭의 재정 적자가 일상화되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신자유주의 프로젝트 또한 영광의 30년 동안 높아진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미국의 제조업이 무너지고 러스트 벨트가 나타나게 된 계기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레이건 정부의 재정 적자로 1980년대의 절반 이상 동안 미국 달러가 고평가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국에서의 생산 비용이 외국 기업의 가격보다 높으니 투자를 줄이고 축소하라는 신호가 1980년대에 미국 제조업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잘못된 신호였다. 즉 시장이 비교 우위의 논리로 보낸 신호가 아니라 재정 적자로 인해 미국 정부가 차입하려는 단기 현금 수요가 급등하면서 전달된 신호였다. 결국 레이건 정부의 감세 정책은 미국의 제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오늘날 러스트 벨트로 알려진 지역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성과가 뛰어나지 못했음에도 신자유주의는 대중의 저항을 부르기보다는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그 이유의 일부를 이데올로기 승리(사회주의의 몰락)의 공을 신자유주의의 기수 레이건이 가져갔다는 데서 찾는다. 대처의 경우에는 포클랜드 전쟁 승리로 한껏 고양된 영국인들의 심리가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90년대 이후에는 3차 산업혁명으로도 불리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일시적인 생산성 상승이 신자유주의 국면을 지속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2008년 경제 위기와 장기 20세기의 종언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정보기술의 발전(혹자는 3차 산업혁명으로도 부른다)과 함께 25년 가까이 심각한 경기침체나 인플레이션은 자취를 감추었다. 2007년 이전 10년간만 보면 생산성 상승률은 2차 대전 이후의 황금시대에 근접한 수준으로 높았다. 대안정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첨단기술의 발전이 북방세계의 생산성을 현저히 높이던 시대는 2007년에 끝났다. 무어의 법칙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고, 정보 제공(최소한 효용은 높여주었다)에서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로 (인간의 심리적 약점과 편향을 이용하여 주목을 끄는 방식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그 사이 일련의 금융위기가 있었고 파생상품 시장이 커지고 복잡해지고 있었음에도 규제는 완화되었다. 대공황의 기억은 잊혔고, 중앙은행과 금융가들은 자신감과 오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오만이 복수를 불렀다.
들롱은 2007~2008년 경제위기가 불가피했거나 심지어 필요했다는 주장(대표적으로 시카고의 코크레인은 “우리는 경기침체를 겪어야 한다. 네바다의 건설 현장에서 평생 못질하며 살았던 사람은 이제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공황 때에도 경기침체는 필요한 일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동일한 주장이 있었다)을 건설업에서의 조정은 위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며 반박한다. 또한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출을 확대해야 할 시점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라고 한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유령 도시’가 된 건설 프로젝트를 일으켰던 중국 정부가 경제위기가 가장 잘 대처한 국가라고 평가한다.
2007~2008년 경제위기에 북방세계의 정부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장기 20세기는 2010년에 끝났다. 이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확인되었다. 성장은 느려졌고, 세계화는 역전되었으며, 미국은 더 이상 리더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거대 내러티브가 필요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 미국의 1인당 실질 GDP 증가율
1946~1976년 3.4%
1976~1996년 2%
1996~2006년 2.6%
2006~2016년 0.6%
방대하면서도 세밀한, 신랄하면서도 위트 있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스스로를 신자유주의 주변의 경제학자라고 이야기하는 저자는 실제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차관보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장서 시행했던 당사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수많은 쟁점과 깨알 같은 디테일을 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다. 저자는 역사의 필연적, 구조적 흐름을 설명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개인’의 역할과 우연적 요인을 상기시킨다. 파시즘과 현실사회주의가 좌우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문제라기보다 말굽의 편자와 같은 형상일 수도 있다든지, 극단적인 시장지상주의자가 파시즘을 지지하던 사례(하이에크는 대처에게 편지를 보내 피노체트를 지원하라고 요청하지만, 대처는 단호하게 거절한다)도 등장하며. 최근 제기되는 탈성장에 대한 입장도 짐작할 수 있다(노아 스미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빈곤선 아래의 사람들이 수억 명이 있다고 에둘러 입장을 밝힘). 이 외에도 중국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로 리훙장이 신경 쓰던 카이핑 탄광을 홀라당 벗겨 먹은 허버트 후버, 괴팍한 성격의 니콜라 테슬라, 철도망과 전신망의 건설에 불만을 토로하던 중산층 백인 남성 헨리 소로, 가족과 함께 방문한 뉴욕을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는 용광로’라고 칭한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트로츠키,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로 전향한 무솔리니, 뉴욕에 금융가인 외할아버지를 둔 윈스턴 스펜서 처칠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박사과정 학생에게 “너가 보내준 연구계획서에 노벨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는 저자의 독설과 위트도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