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는 생물학적으로 누에나방의 애벌레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형태적으로 이런 구분도 있다. “누워 있는 벌레.” 벌레가 누워 있다니 좀 수상하다. 문어는 머리를, 달팽이는 배를 밀며 걷듯 곤충의 애벌레는 짧고 많은 발로 기는 족속 아니었던가. 누에는 그 흔한 가시도 독침도 없이 태평하게 누워 있는 애벌레다. 역설적으로 누워 있어도 될 만한 비범한 구석이 있다는 뜻일까. ― 6쪽 〈프롤로그〉 중에서
뽕잎을 잘게 잘라 상자에 넣어주었다. 당장 되돌려주겠다 던 마음은 간데없고 먹이를 향해 고개를 움직이는 애벌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해하고 최소한의 삶이었다. 그것들과의 한집살이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이라는 고치에 뭐가 들었는지 맞닥뜨리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며칠 못 가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누에에 게 홀딱 빠져들어 사람 눈 피해 뽕잎 뜯으러 다니는 심마니가 될 줄은, 이 미끄덩하고 수상한 것들을 공들여 키우게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20쪽 〈무해한 최소한의 삶〉 중에서
누에도 쏟아지는 졸음은 참을 수 없나보다. 누에가 잠에 빠져드는 광경은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도록 무구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은 무아지경으로 뽕잎을 갉다가 한순간에 고개를 톡 떨어트린다. 입에서 이파리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팔랑 떨어지고 누에의 머리가 이파리를 따라 내려앉으면 숙면 시작이다. ― 72쪽, 〈잠분의 탄생〉 중에서
때는 바야흐로 누에의 시간으로 3령, 누에 집사의 시간으로 일주일째다. 비로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고, 생을 향해 전투적으로 나아갈 시점이라는 얘기다. 나중에 지인은 “애벌레들에게 뽕잎을 주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저렇게 열심히 먹고, 내일이면 먹은 만큼 자라 있는 데에 뭐랄까 감동을 좀 받았지”라고 말했다. 다행이다. 지인이 애벌레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주니 나로선 응원을 받은 기분이다. ― 80쪽, 〈마음은 뽕밭〉 중에서
오랜 짝사랑 끝에 상대로부터 오케이 한번 사귀어보자, 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고작 회오리의 이마를 만지고 몽쉘의 등을 쓸어봤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마치 누에들이 나를 반려인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기분이 두둥실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 92쪽, 〈누에 성장일기〉 중에서
눈이 있으면 찾아가겠지만 누에는 기어가 더듬어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어쩌다 뽕잎을 만나면 집짓기의 8할이 완성된다. 뽕잎 표면에 아교뭉치를 붙이고 그곳에 실을 이어 잎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연결해 보를 만든다. 그다음 돌돌 말아내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안전한 요새가 만들어진다. 모서리 다음으로 인기 많은 가옥의 형태는 평면에 실을 붙여 고치를 매다는 방법이다. 일종의 트리하우스다. ― 123쪽, 〈둥지 안의 하얀 집〉 중에서
두 마리의 수컷누에나방이 대치 중인 둥지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녀석들이 다투어 파닥이는 날갯짓은 훗날 암컷에게 선택받은 수컷의 득의양양한 노래가 되거나 암컷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만년 솔로들의 외로운 하소연 중 하나일 것이다. 바야흐로 잔인한 계절이 찾아왔다. ― 152쪽 〈애벌레, 날개를 달다〉 중에서
며칠 뒤 나는 침실용 램프를 꺼내와 둥지가 있는 방에 놓아주었다. 바다 부분은 검고 대륙에만 은은한 빛이 들어오는 아름다운 지구본 램프였다. 방바닥에 내려놓고 스위치를 올리니 남반구에 위치한 브라질, 호주, 아프리카 주변으로 나방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녀석들은 램프와 창가, 둥지 등 다양한 곳에서 어둠을 기다렸다가 아침을 맞았다. 또 한 번의 태풍이 한반도를 매섭게 할퀴고 지나간 아침에도 누에의 방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머리를 감고 대충 물기만 털어낸 채 누에의 방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183쪽 〈지구본을 선물하다〉 중에서
매일 오르는 집 앞 산책로 가장 높은 곳, 흰둥이 바로 옆에 땅을 파고 나의 여덟 마리 누에나방을 묻었다. 멜론만 한 크기의 돌을 무덤 위에 비석처럼 내려놓는 순간 누에나방과 함께한 나의 소중한 시간이 비로소 막을 내렸다. 여름이 물러갈 즈음 노랗고 검은 은사시나무의 이파리들이 나방들과 애벌레의 무덤 위로 떨어졌다. 아침마다 일부러 그곳을 돌아 산책을 한다. 다섯 개의 돌이 병정처럼 에워싼 그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누에나방들이 먼 곳으로 소멸하는 여행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 ― 216쪽 〈굿바이 막냉이〉 중에서
나는 다시 숲으로 간다. 삼킨 만큼 뱉으면서 나아가는 것, 숲에서 내가 하는 일은 오로지 이 한 가지다. 누에나방을 만난 뒤로 한 가지 주문이 더 추가되었다. 자연스러운 것을 이기는 고결함은 없다. 한껏 고결한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흐르듯 숲으로 간다. 사랑하는 데에, 살아가는 데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기분이다. 하찮은 것으로부터 매혹되자 비로소 고결해지는 유쾌한 역설이라니! ― 239쪽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