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현재 인간이 기술을 고려하지 않고서 일상을 영위하고 고도의 사유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컴퓨터와 리마인더 그리고 생체리듬 시계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글을 타이핑하는 필자조차 신체적으로 이미/항상 그리고 순간순간 기술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지향을 경험한다. 기술은 내 신체에만 머물지 않고 지구 행성 전체를 뒤덮은 인터넷망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오늘날 철학은 향수 어린 복고주의에 머물며 철 지난 개념의 유희에 만족할 것이 아닌 이상 기술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완전하게 정초될 수 없다.
_ 01 “근대, 기술적 객체, 기관론” 중에서
디지털 ‘환경’ 속에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관계만 존재한다. 육후이는 자신의 디지털 존재론이 ‘관계적 존재론’임을 분명히 한다. 디지털 기술은 대상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관건은 관계를 물질화하는 것이다. 물질화한 관계는 축적되고 이전되며 호환된다. 즉 위상적이다. 따라서 시공간은 관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절대적 좌표로서 놓이지 않는다. 디지털 줌 렌즈는 공간을 당기거나 더 멀리 보내 버리고, 검색 엔진은 미래와 과거를 더 가깝게 옮겨 놓는다.
_ 03 “관계, 간객체성” 중에서
기(器)는 문자 그대로 살피면 용기(容器), 즉 무언가를 담아내고 보존하는 도구를 의미한다. 이를 기술철학적 대상으로 바라보면, 기록 또는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는 동북아 사상 속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인 ‘도(道)’와 늘 함께한다. 도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함축을 지닌 개념이다. 우선 그 요의(要義)만을 취하면, 도는 ‘인륜과 자연의 본체’이자 ‘진상(眞相)’이다. 도는 우주론이자 도덕이다. 한편 기는 그 우주론의 일부로 그 자체로는 규정되지 않으며, 인간적인 것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원리가 된다.
_ 05 “기와 도” 중에서
재귀성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내재적이고 자기목적적인 한에서 그러하다. 재귀성에는 외적 목적이 없다. 이 때문에 육후이는 기존의 목적성(finality)이라는 개념 대신 목적률(teleonomy) 개념을 선호한다. 목적률은 사이버네틱스적인 자기목적성을 띠는 피드백 순환상(循環相)을 취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만 사이버네틱스는 가동적(operational) 영역에 놓이며, 통합적 경향을 띤다. 그러나 이러한 피드백 순환상은 한 영역에서만 맴도는 것이 될 수 없다. 육후이는 1차 사이버네틱스에서 발견되는 목적성이 기정적(predefined, 미리 정해진)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가 출발한 곳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여기서는 피드백 과정에 개입하는 관찰자나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2차 사이버네틱스는 관찰자와 환경 모두를 피드백 안에 놓는다. 따라서 2차 사이버네틱스에서 순환상은 기정적이지 않고 확장적이며 창조적이다. 즉 한 영역에 갇히지 않고 물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다른 환경 안으로 진입한다. 요컨대 자연과 기술 모두는 창조적 재귀성을 띤다.
_ 06 “재귀성” 중에서
기술생태다양성은 자본의 동질화와 획일성에 저항하기 위해 분투하는 세계의 수립을 요한다. 이때 코스모테크닉스는 유럽적이고 미국적인 관점에서 자동화의 가속화만을 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하나의 기술사나 인간-기계 복합체만이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하게 한다. “오히려 모든 민족-국가가 그들 자신의 가속주의 부처(Ministry)를 가질 것이다.”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 한국, 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아프리카 혹은 사라진 부족들의 코스모테크닉스가 필요하다. 이로써 전 지구적 축의 동시 동기화를 더 광범하게 강화하는 끔찍한 미래를 방지할 수 있다.
_ 10 “강도와 가속”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