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빌딩 옥상을 건너뛰다
2021년 6월, 강남 빌딩 옥상을 건너뛴 젊은이가 있다. 전 세계에 34명뿐인 국제 공인 마스터코치 김지호다. 2020년 1월, 그는 일본에서 봄에 열릴 예정인 ‘국제체조연맹 파쿠르 세계선수권대회’ 스피드 코스 종목 출전을 앞두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대회가 갑작스레 무기한 연기됐다. 그 순간 다큐멘터리 〈루프컬쳐 아시아(RoofCulture Asia)〉가 생각났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 파쿠르 팀 스토러(Storror)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4대 도시—싱가포르, 홍콩, 서울, 도쿄—의 빌딩 옥상을 도구나 장비 없이 맨몸 하나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파쿠르 커뮤니티 내부에 스토러 팀의 행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위험천만한 옥상 점프는 건물주와 시민, 아시아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다. 그 또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러 팀이 방문한 강남 빌딩 옥상을 답사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스토러 팀의 탁월한 신체 능력과 정신력,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태도에 경외감이 들었다.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파쿠르에 관한 생각과 철학, 제도와 시스템, 물건 등에서 과연 내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 있을까? 내가 지금 누리고 생산하는 것은 이미 누군가 해 놓은 것을 똑같이 따라 하고 주석을 단 수준은 아닐까? 나의 고유한 길, 나만의 독립적인 사유를 생산하고 싶은 욕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는 강남 빌딩 옥상을 건너뛰기로 결심하고 꼼꼼한 준비를 거쳐 실행한다.
전 세계에 34명뿐인 국제 공인 마스터코치 김지호의 파쿠르 이야기
중·고등학생 때 김 코치의 몸은 올챙이배에 빼빼 마른 멸치였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며 앉아 있었고, 운동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는 서서히 죽어 가는 느낌이었다. 태어나 보니 해야 할 일들이 모두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성적을 내서 좋은 대학에 간 뒤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소유하고,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야 하는 세상. 심지어 좋은 장례식장까지 기준이 정해진 세상. 탄생부터 죽음까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모든 것이 정해진 삶에는 인간 김지호의 삶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런 그가 열일곱 살에 친구 따라 영화 〈야마카시〉를 보고 파쿠르에 빠져든다. 〈야마카시〉는 초등학생 시절 모험 놀이를 떠오르게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경찰에게 쫓기면서도 건물과 건물 사이를 점프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장면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열망에 불을 지폈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만 살아온 자신과 달리 그들은 진심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의 마음속에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파쿠르 창시자들과 야마카시 멤버들을 덕질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야마카시〉 개봉 이후 회원 수가 5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동호회가 된 다음 카페 ‘야마카시 코리아’에서 활동했다. 야탑역 4번 출구 앞에서 모임을 주도한 적도 있다. 아버지가 마음대로 지원한 대학교를 사전 답사했다가 파쿠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는 생각에 입학했다. 그리고 많은 노력과 우여곡절을 거쳐 파쿠르 지도자가 되었다. 게임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청소년이 국제 공인 파쿠르 마스터코치가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김 코치의 여정, 그가 말하는 트레이서로서의 삶과 파쿠르 철학, 파쿠르의 기본 개념과 기초 기술 등이 들어 있다.
아이처럼 자유롭게 상상하고 움직이자!
파쿠르는 인간의 보편적인 움직임 활동이다. 걷고, 뛰고, 달리고, 매달리고, 균형 잡고, 올라가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지형지물에 따라 반응한다. 시대적 상황과 목적에 따라 이름과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따라서 파쿠르를 스포츠인지, 예술인지, 무술인지, 놀이인지, 체육인지 분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파쿠르의 정체성을 하나의 관점으로 제한하게 된다. 파쿠르를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파쿠르의 명칭은 움직임의 예술(L’art du Déplacement), 파쿠르(Parkour), 프리러닝(Freerunning) 등 다양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똑같은 코스로 걷는 아이들은 없다. 직진하면 빠른 길을 지그재그로 뛰어다닌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요리조리 피한다. 걸어야 하는 곳에서 뛰고, 뛰어야 하는 곳에서 점프한다. 담장 위를 걸으면서 환호하고, 놀이터에서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간다. 고정관념 없이 지형지물을 가지고 자유롭게 노는 모습, 파쿠르 본연의 모습이다. 단지 나이가 들면서 상상력을 잃고 움직임을 멈췄을 뿐이다.
따라서 김 코치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뛰어난 파쿠르 기술을 구사하거나 파쿠르라는 특정한 분야에 매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파쿠르를 잘한다고 해서 파쿠르의 관점과 해석을 잘 구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멋지고 화려한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보다, 별 볼 일 없지만 자기만의 언어와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움직이는 사람이 더 파쿠르답다. 익숙한 도시, 사물, 주변 환경을 아이처럼 자유롭게 상상하고 움직이며 세상을 놀이터로 볼 수 있는 자세, 이것이 그가 바라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