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정신과 의사가 10년 동안 주고받은 인생의 대화
시인은 시어를 통해, 정신과 의사는 대화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고 치유한다. 둘 다 언어의 힘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그 내면세계를 통찰하는 사람들이다. 내담자가 길고 지루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치료자인 의사는 그의 말을 정성껏 듣고 간결하게 핵심 감정을 짚어주며 필요한 답을 해주기 때문이다. 약을 처방하는 내과 의사처럼 정신과 의사는 언어로 마음 치유를 돕는 역할을 한다.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이러한 대화의 치료 과정을 저자는 참된 말이 길러지는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시인이 시를 짓는 것도 참된 말을 하는 시간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세월이 갈수록 더 간결해지고 있다. 저자 이영문과 나태주 시인은 오랫동안 교류하며 인생과 인간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은 천일야화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시는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가
저자는 ‘정신분석’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한 공부라고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아프게 남아 있는 이유는 사랑의 기억에 관여하는 감정과 장소와 이야기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나태주 시인이 쓴 35편의 명시를 소개하며 시의 주제와 연계된 여러 가지 감정들, 사람들의 마음 풍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태주 시인에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마움의 대상이다. 외로움과 그리움도 고맙고 구름과 바람까지도 고맙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자신을 용서하고 고마워할 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저자는 자기 심리학(self psychology)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그 출발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먼저 용서하라는 말이다.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을,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자기 용서가 진정한 자존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아픈 마음을 치료한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각자의 슬픔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마음에 고통을 느낀다. 시인의 상상력은 이러한 고통을 없애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의학적 치료를 넘어서는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래서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다. 의식주, 즉 인간을 살리는 기본 요소들만 '짓는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여러 번의 수고가 들어가야 '짓는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은 곧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이것은 나태주 시인의 철학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얼어붙은 땅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심정처럼, 고통을 함께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때 자비가 생긴다. 공감의 싹이 트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과 정신치료자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치료라는 의학적 장르와 치유라는 시의 영토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시를 짓고, 시는 사람을 살린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질문에 답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결핍을 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기 위한 무의식의 흐름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 저자는 나태주 시인의 시 ‘멀리서 빈다’를 접하고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고 말한다. 40년 전, 서울로 유학을 떠나던 날 기차역에서 울먹이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친구는 그를 대신해 상처 입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일찌감치 부모와 동생을 잃었던 친구는 여러 면에서 성숙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에는 저자의 이런 진심과 곡진한 마음이 가득하다. 청년들에게 분리 불안을 헤쳐 나갈 첫 단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라고 조언하고 있으며,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충고한다. 자존감이 무너진 세상에서도 반드시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며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는 시와 함께 강박을 줄이고 마음 한구석에 여백을 남겨 놓으라고 말한다. 우울하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고 겸손하므로 생기는 감정이다. 이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슬퍼할 일에 충분히 우울해지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다독인다. 저자는 ‘네 인생을 살아라(Vis ta vie)’라는 말처럼 우리는 모두 자기 앞의 생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