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21세기 민주당의 역사다. 모든 장면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대목은 빠짐없이 기록했다. 내 주관적 생각이 반영되어 있지만, 배워야 할 교훈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리해보았다. 학자 입장에서 정리한 글이 아니므로 학술적 가치가 높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격동의 민주당사史를 현장의 경험자로서 기술했으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 〈민주당의 25년을 돌아보며〉 중에서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불거졌던 각 세력 간 갈등은 민주당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첫째, 호남 출신 정치 세력 내 신·구 세력간의 갈등이다. 3김 시대의 지역 대표 맹주는 누가 뭐라 해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이었다. 이에 반기를 드는 행위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 만한 일이었다.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이 된 이후, ‘포스트 김대중’이 누가 될지는 호남 출신 정치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동교동계는 김대중 대통령의 가신 그룹으로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천신정 같은 신흥 리더 그룹은 자신들이야말로 동교동계를 대체할 호남의 차세대 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남 지역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정당으로서는 호남을 누가 대표하느냐가 정치생명의 사활을 걸 만한 문제였고, 이는 때마다 갈등 사안이 되었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당 민주주의였고, 그중에서도 당원의 권리를 획기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중요했다. 과거 정당의 모든 의사결정은 총재가 내렸고, 그것이 일상이었다. ‘총재님의 뜻’이라고 하면 토론 없이도 의사가 결정되곤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창당 후에는 모든 의사결정이 토론과 표결로 이루어졌다. 총재나 당 대표로 구성되던 지도부도 최고위원회라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 국회의원 공천도 당원 투표와 여론조사를 병행한 상향식 공천제도로 변경되었다. 과거 제16대 총선까지는 당의 심사 결과를 토대로 총재가 공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에서는 경선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로 변경되었다.
개혁을 열망하는 지지층은 될 수 있는 최대한의 철저한 개혁을 원한다.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는 여야 간의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최대한 합의 통과를 시도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야당이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면 지지층은 다수 의석을 가지고 대체 뭐하느냐고 질타하기 시작한다. 지도부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심 단독 처리를 통해 지지자들을 통쾌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단독 처리를 자주 하다 보면 일방적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단독 처리로 밀어붙일지, 아니면 핵심 내용 일부를 수정해서라도 합의 통과를 유도해볼지는 전적으로 지도부의 결단에 달려 있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딜레마를 열린우리당은 잘 해결하지 못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통합과 혁신의 상징이자 재창당의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당명이 바뀌는 부침은 있었지만, 열린우리당이 만들어낸 새 정치제도와 형식, 당원 중심의 참여형 정당이라는 성격과 민주통합당의 진보적 가치는 계승되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축이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민주당 계열 정당 역사에서 제일 오래 유지된 정당 모델이기도 하다.
- 〈민주통합당의 등장과 두 번의 전국 선거〉 중에서
2012년 문재인 선거 캠프의 또 다른 특징은 수평적 네트워크를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추진했던 점이었다. 문재인 후보는 세대 교체형 선대위원장에 더해 선거 캠프를 정당 선대본과 시민 캠프, 그리고 학자들 캠프까지 3개 조직으로 꾸렸다. 각기 다른 성향의 세 그룹에 모두 참여 기회를 주려는 의도는 좋았는데, 문제는 선거 조직의 덩치는 커졌는데 수평적이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지고 일사불란함이 없었다.
- 〈민주통합당의 등장과 두 번의 전국 선거〉 중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따지면 2013년 이후에도 86세대에 해당하는 정치인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정치 그룹으로서의 ‘86’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언론은 그 이후에도 계속 86세대 혹은 86그룹이라는 용어로 우리를 함께 묶어서 지칭했다. 그룹은 이미 사라졌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정치인만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실체가 없는 86그룹을 계속 입에 올릴까? 왜 때만 되면 ‘86 용퇴론’이 화제가 될까? 지난 제22대 총선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86 운동권 심판론을 내세웠을 때, 어이가 없었다. 가상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 총선의 주요 이슈라니, 민주당 86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계파 싸움의 가장 큰 매개점은 대선이고, 그다음이 총선이다. 당이 깨질 정도로 큰 갈등은 다 여기서 생긴다. 지방선거 때도 출마자들의 공천 문제로 시끄럽기는 하지만, 당이 깨진 적은 거의 없다. 항상 대선과 총선이 계기가 되는데, 주로 먼저 계기가 되는 것은 대선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 주자들이 당내 후보 선거를 앞두고 이해관계로 부딪히면서 인간관계의 다툼이 당내 분열을 구조화한다.
-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중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한 석 차이로 제1당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당의 협조를 얻으려면 양보도 해야 했다. 하지만 전부 양보할 수는 없었다. 협상이 필요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협상에서는 전략이 제일 중요하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 물론 핵심 지지층은 중요해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쟁취하기를 바라지만, 원내 협상의 자리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중에서
그러나 내 임무는 광장과 똑같은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와 특검을 잘 진행하는 일이 제도권에서 활동하는 내게는 더 우선적인 과제였다. 만약 탄핵으로 가야 한다면 탄핵에 필요한 정족수부터 먼저 확보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하야니 탄핵이니 하는 주장은 광장의 요구 사항이고, 그것을 국회에서 어떻게 현실화할지에 관해서는 섬세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단순히 나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광장에서 함께 탄핵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면, 아마 탄핵 국면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비밀리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 정당 생활의 3분의 1 이상을 당의 분열을 막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할애했다. 그러다 보니 양쪽 지지자들에게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마음을 비우고 완충지대 역할을 맡아야 한다. 특히 당내에서 어느 정도 위상이 있는 중진 의원들이 완충 역할을 잘해주어야 갈등을 좀 더 쉽게 완화할 수 있다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분열과 통합의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