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두통 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일어날 거라 상상조차 못하는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내게 편두통은 책 속 활자로만 존재했다. 그러니 지금은 뻔히 보이는 수면 패턴의 변화와 두통 사이의 인과를 쉬이 연관 짓지 못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반복적으로 두통을 앓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면 나서서 병원을 찾지 않았겠는가. 병원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나 훌쩍 지나서였다.
#23쪽_1장 두통의 발견
편두통은 대표적인 일차성 두통으로, 두통이 증상이자 질환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통은 질병이라기보다 일시적 증상으로 해석된다. 감기, 몸살 등을 원인으로 두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에 따라 두통을 저절로 낫는 증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대다수가 흔히 겪는 두통은 가벼운 이차성 두통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통만이 아니라 통증 대부분은 이런 시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치료된다. 나아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하기보다 일시적 증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통증을 막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 이상의 적극적 행동을 취하는 게 쉽지가 않다.
#63쪽_2장 두통 진단의 어려움
의사의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진통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바로 아세트아미노펜과 NSAIDs계 진통제다. 두 진통제는 두통, 생리통, 치통, 근육통 등 거의 모든 통증에 1차적으로 사용되며, 경증에서 중증 편두통 완화에 효과적이다. 두 진통제의 차이점은 소염 작용의 유무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열이 나거나 통증이 있을 때 사용하는 해열진통제로 소염 작용은 없다. NSAIDs계는 해열진통 작용에 더불어 소염 작용까지 있다. NSAIDs계 진통제로는 이부프로펜, 덱시부프로펜, 나프록센, 케토프로펜, 디클로페낙 등이 있다.
#84-85쪽_3장 편두통과 진통제
이번에 만난 의사는 30~40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역시 눈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대로 나갈 수 없어서 나는 안과적 증상과 함께 두통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젊은 여성의 경우 눈의 이상이 편두통 때문일 확률이 있으니 신경과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다른 의사처럼 그냥 내보내도 되었을 텐데 한마디라도 더 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정처 없이 헤매던 와중 마침내 올바른 이정표를 찾았구나 싶었달까. 그리하여 드디어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이 신경과라고 확신했다. 매일 머리가 아프고 진통제는 더이상 듣지 않게 된 시점이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쯤 신경과를 찾게 되었다. 안타깝고도 긴 시간이었다.
#93-94쪽_4장 처음 방문한 신경과
당시 나는 ‘편두통 중첩 상태’였다. 일반적인 편두통 지속시간은 72시간 내인데(4~72시간), 72시간 이상 계속되는 심한 편두통을 ‘편두통 중첩 상태’ ‘편두통 지속 상태’라 한다. 며칠 동안 잦아들지 않는 두통으로 힘들었던 내 상태를 가장 간단히 표현하는 말이다. 편두통은 날마다 오는 게 아니며, 특성상 한 번 오면 며칠은 발작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발작과 발작 사이에는 대개 통증이 없다. 그러나 편두통 발작 사이에도 증상이 계속될 수 있는데, 편두통과 다른 두통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긴장성 두통과 편두통을 같이 가지고 있다면 통증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114쪽_5장 편두통을 진단받다
편두통은 개인마다 양상이 다르고 증상에 차이가 있다. 또 두통 치료는 효과나 부작용 정도를 나타내는 객관적 지표가 없기 때문에 치료를 최적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개개인마다 맞는 약이 달라서 나에게 맞는 예방약을 찾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우선순위가 높은 약물을 시도하고 효과를 보이는 약물을 찾는 데 필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필요한데, 나처럼 중간에 병원을 바꾸게 되면 그 시간이 더 길어진다. ‘병원을 자주 바꾸면 안 좋다’라는 말은 대체로 어느 과에나 적용되겠지만, 특히 신경과는 한 곳을 계속 다니는 게 좋다.
#150-151쪽_6장 다시 대학병원으로
한창 직장을 정말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친한 친구 두 명에게도 이 마음을 토로했다. 친구의 생각도 언니와 같았다. 당장 일은 그만두라고, 새로 직장을 구한 뒤부터 심하게 아팠으니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질 거라고. 그럴듯했다. 그러나 강경한 친구의 반응에 움찔 놀란 나는 ‘이럴 것까지 있나’ 하는 마음으로 슬쩍 뒤로 물러섰다. 다른 한 친구는 내 의사를 존중했다. 적응도 다 했으니 계속 일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가는 대로 하기에 나는 너무 아팠고 흔들렸으며, 혹 잘못된 선택일까 봐 겁이 났다.
#166쪽_7장 작고 큰 삶의 변화들
두통이 잦은 사람은 두통이 올 낌새만 있어도 약부터 찾는다. 아플까 봐 겁이 나서 미리 약을 복용한다기보다는(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필요한 순간 가능한 한 빨리 대응하기 위해서다. 곧 ‘참기 힘들다’를 넘어 ‘더는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지 않도록 하려는 준비랄까. 늦으면 늦을수록 고통을 견뎌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감이 생겨서 두통이 오기 전에 미리 약을 먹기도 한다). 나는 외출할 때 제일 먼저 약부터 챙긴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통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173-174쪽_8장 편두통 환자의 일상
나는 많이 아픈데도 많이 아프지 않은 것처럼 말하곤 했다. 걱정되면서도 그냥 지나치듯 가볍게 말하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바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당시 내 현실 인식이 그랬다. 대책 없이 긍정적이었던 건 내심 변모한 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아프고, 한동안 계속 아플 거고,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197쪽_9장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두통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다. 두통 일기는 두통 유발인자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두통이 있을 때 어지럼증과 위장 증상(울렁거림, 속쓰림,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이 자주 동반된다. 두통이 오기 전 목이나 어깨가 이유 없이 아프기도 한다. 편두통 유발 요인, 자주 경험하는 두통 전 증상, 동반 증상, 약 복용 후 완화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을 알고 있다면 언제 닥칠지 모를 고통에 좀더 의연히 대처할 수 있다.
#211-212쪽_10장 두통 일기 그리고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