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평면표지(2D 앞표지)
입체표지(3D 표지)
2D 뒤표지

모란봉에 모란꽃 피면 평양 가겠네


  • ISBN-13
    979-11-5662-708-1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주식회사 아시아 / 주식회사 아시아
  • 정가
    20,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5-20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이대환
  • 번역
    -
  • 메인주제어
    문학: 문학사 및 평론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문학: 문학사 및 평론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3 * 225 mm, 428 Page

책소개

20세기의 한반도, 대공황기의 아메리카에 새겨진 ‘한흑구 아리아’ 93편!

‘단 한 편(片)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를 위한 Aria 93편!

 

한흑구 탄생 115주년을 맞는 2024년 늦봄,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93편의 작은 이야기로 엮어낸 책이 나왔다. 편마다 인용한 작품과 그 상황을 통찰한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마치 해설을 곁들인 아리아 93곡을 감상하듯이 읽을 수 있다. 〈Han’s Aria 한흑구 아리아〉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모란봉에 모란꽃 피면 평양 가겠네』이다. 저자는 포항 출신으로 『박태준 평전』도 쓴 이대환 작가(66세)다.  

목차

애인보다 가까운 조지훈과 함께 다시 모란봉에 올라보고 싶지만 . 13

아버지는 창끝에 찔려 넘어졌고 나와 동무는 도망하여 나왔노라 . 18

함박눈 내리는 날 지게꾼이 오고 어머니는 소리 없이 울었네 . 21

‘High thinking, plain living’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혜성’을 결성해 문학의 길로 . 26

‘봄비’에 촉촉이 젖고 ‘국경의 밤’을 가슴에 묻고 . 29

《진생》에 처음 시를 발표하고 경성 가는 야간열차에 오르다 . 32

「인력거꾼」으로 남은 경성의 봄날에 누가 해학미를 살리라고 요구하는가 . 36

한 나무의 두 줄기로 어우러져 우람한 거목으로 자라날 작가정신 . 40

세광(世光)이 문학인 흑구(黑鷗)로 거듭나는 태평양 횡단과 검은 갈매기 . 43

시카고에서 아버지와 13년 만에 재회하여 더 홀가분하게 문학의 길로 . 47

시카고의 동포들과 눈물로 맺어준 파인 김동환의 시 한 편 . 50

시카고의 괴테여, 고향의 봄은 언제 오겠소? . 52

명예와 세력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한 깃발 아래서 고함소리를 합하자 . 55

미시간호반을 대동강처럼 헤엄치는 ‘누런’ 피부색과 “헤이 몽키!”의 떨어진 포크 . 59

노스파크대학 영문학과에 들어가 월트 휘트먼과 칼 샌드버그를 만나다 . 62

이 악착한 세상에서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노라 . 67

258번째 흥사단 단우 한흑구의 고언(苦言), “수양을 넘어 실제적 진취로 나아간다면!” . 71

인간사회의 모순을 수술하려는 우리의 수술대에 환자를 눕혀 놓고 . 74

정열의 시인 바이런의 기백으로 1931년 새해의 먼동을 맞다 . 78

나이아가라 폭포의 위대한 진리는 흐르고 모이는 합(合)이거늘, 동지들이여! . 83

‘고(苦)’를 ‘학(學)’하는 고학의 볼티모어에서 조선 문단에 시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계절 . 90

낟가리 쌓은 들판의 북풍을 생각하며 송곳 하나 꽂듯이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으로 . 95

이민문학의 효시 ‘강용홀의 소설 『초당』’, 이를 비판하는 청년 한흑구의 새맑은 민족적 자존 . 98

한국문학사에 최초로 흑인문학을 올려놓으니 조선 문단은 데면데면 엑조티시즘으로 여기고 . 103

국제학생회에 조선 학생 대표로 나가 침묵부터 5분간 하는 한흑구 . 109

도산 안창호 체포 소식의 충격과 첫 단편소설 「호텔 콘」 . 113

감옥 같은 조선 땅에서 배움에 목말라 왔건만 민주주의여, 자유와 평등은 어디 있느냐? . 118

녹슬은 군국주의의 창끝은 부러지고 새로운 조선의 들판으로 달려가리니 . 122

갈 곳 잃은 안익태가 첼로만 들고 필라델피아 한흑구의 셋방에 들다 . 126

걸음에도 리듬을 타는 빈털터리 안익태는 밤낮 꼬박 첼로만 켜고 있는데 . 132

커티스음악학교 장학생 선발시험 후 울지 않은 안익태는 어디로? . 136

한흑구의 주선으로 템플대학 음악과에 들어가고 커티스음악학교 짐바리스트의 지도를 받는 안익태 . 139

한흑구-반하우스 목사-윌리 부부, 그리고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 서곡 . 143

1933년 여름을 미시간호반 여관에서 지내며 넥타이 파는 한흑구와 첼로 켜는 안익태 . 149

안익태의 시카고대학 독주회 때 복도에 홀로 서서 눈물짓는 한흑구 . 155

뉴욕에서 눈물로 작별한 안익태와 한흑구, 이들은 언제 다시 만나려나? . 160

1934년 카네기홀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직접 지휘로 초연한 안익태 . 165

안익태의 ‘고립’을 넘어선 런던 편지와 ‘독립’을 이룩한 연미복의 지휘봉 . 170

한글 시 200편과 영시(英詩) 100편을 쓴 청년시인이 최초로 필명 ‘흑구’를 《신한민보》에 올리고 나서 . 175

‘심장의 노래’를 다짐한 청년시인의 귀국 소식을 《조선일보》가 크게 특필하다 . 180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 문학의 길로 정진하겠다는 한흑구의 자화상 . 184

‘헐어지는 집’에 돌아와 휘트먼을 호출하고 16만 평양시민의 종합지 《대평양》을 창간하다 . 188

심장에 ‘님’의 조각으로 ‘영원’을 새겼으니 젊어서 죽거든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 . 194

암탉이 달걀을 품듯이 소설을 창작하며 다시 ‘황혼의 비가’를 듣다 . 198

일제의 검열이 만주 산허리를 갉아먹고 사는 백의인(白衣人)의 유랑생활은 잘라버리고 . 202

어머님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정령은 내 가슴으로 . 206

“판사여, 법률의 눈에서 내가 과연 산 사람이냐?” 영국 실직자의 질문과 함께 산문 시대로 . 209

암흑시대의 등불 ‘백광(白光)’을 켜고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 215

파인 김동환의 《삼천리》와 최정희의 애수 그리고 한흑구의 휴머니즘 . 221

낙엽을 태우며 《백광》에는 수필만 넘겨주고 평양냉면을 싫어한 소설가 이효석 . 226

일제 검열관이 빨갛게 지워버린 방송 원고와 노총각의 결혼 . 229

아버지와 아들이 안창호와 함께 끌려간 ‘수양동우회’ 사건 . 233

생선 가시 같은 나뭇가지의 마지막 한 잎은 내 마음의 한 조각 . 236

새벽 세 시에 일어나고 눈 감지 못하는 ‘동면’의 나날들 . 241

칼을 차고 찾아오는 마츠다(松田)와 대작해주고 어린 장남과 나란히 낚시를 드리우며 . 244

‘단 한 편(片)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가 마침내 「닭 울음」을 펜으로 듣다 . 248

나라가 패망한 일본인 노부부는 숨어 지내고 나라가 동강난 한흑구 가족은 고향을 탈출하고 . 251

어머니의 품과 같은 나무 묵상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 258

문학의 장르로서 수필의 독자적 가치와 양식을 한국문학사에 개척하고 정립하다 . 264

해방공간의 한흑구가 서울에서 대작한 대주가(大酒家)급 문인들 . 271

한흑구의 영혼에 ‘생명의 서’를 새기고 ‘바위’로 남은 청마 유치환 . 274

푸른 자기(磁器)의 선(線)에서 슬픈 역사를 읽어낸 지훈이여 . 280

“한 형, 나 아직 주정 안 했지?” 하고 히히 웃는 ‘귀촉도’ 시인 . 284

미군정청 통역관 한흑구가 진정으로 기원한 시인 베네의 유언 같은 자유와 평화 . 289

포항시 남빈동의 낡은 집을 둥지로 삼는  검은 갈매기 . 294

내 머리 위엔 감투가 아니라 태양의 따뜻한 볕이 필요하니 . 300

포항에 정착해 번역시집 『현대미국시선』을 출간하고 월트 휘트먼과 흑인 시인의 비명(碑銘)을 되새기다 . 304

길가의 다복솔아, 우리가 죽어가도 너만은 푸른빛을 잃지 말고 . 309

폐허의 포항 시가지에 멀쩡히 남은 너무 낡은 ‘평화의 집’으로 . 313

학도병 47명의 넋이 모란꽃처럼 떨어진 포항여자중학교부터 재건하다 . 317

영일만 이무기를 잡았으니 용왕님께 용서를 빌자는 ‘포항사람 한흑구’ . 320

모든 고초와 비명을 다 마친 성자인 양 기도 드리는 ‘보리’ . 326

새벽이 오기 전이 제일 어둡다, 어서 우리의 밤이 다해지기를! . 331

땅은 좁고, 농민은 많고, 먹을 것은 적으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아나갈까 . 336

마음은 평양의 고향 집을 더듬고 심야의 기차는 포항으로 달리고 . 339

불타는 눈망울로 의혈과 환희의 4월을 보낸 장남과 함께 포항으로 . 343

쇼팽은 망명길에 폴란드 흙을 봉투에 넣었는데 안익태 너도 언젠가 조국의 흙과 만나기를 . 349

가을의 흘러가는 소리는 인생을 불러가는 하느님의 말씀인지 모르니 . 354

아들뻘 문학청년들과 술벗으로 지내며 포항에서 문학을 일구고 가꾸기 . 358

‘청포도 다방’ 살롱 시절에서 한흑구 중심의 ‘흐름회’ 시절로 . 362

갈매기, 너는 한낱 슬프고 험하고 기막힌 방랑자이니 . 368

까다롭지만 자진 종생의 귀양살이라도 능히 해낼 묘한 은둔의 사색가 . 372

김녹촌과 함께 떠난 호남순례 여정을 작전지도처럼 그려둔 한흑구 . 376

빈곤의 골짜기에서 풍요의 지평으로 건너가는 철교(鐵橋) 건설을 축원하며 ‘사농공상’을 비판하다 . 381

노년에는 인생의 주석을 단다는 쇼펜하우어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낚싯대의 먼지를 털다 . 385

운명의 슬픔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저 노목의 그늘 드리우는 사명을 부러워한다 . 389

정년을 기념하듯 『인생산문』을 준비하며 ‘한 오라기의 허구 없이’ 죽마고우 안익태를 회고하다 . 393

허허, 새도 못 주워 먹는 것을 어찌 버릴 수 있겠나? . 396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모란봉에 모란꽃이 핀다면 . 401

꽁꽁 봉인해둔 침묵의 향수(鄕愁)에 속절없이 그만 실밥이 터지고 . 404

수구초심이 ‘평양 지도’를 그려놓는데 고향 산천은 유구할 것인가 . 409

갈매기같이 살겠다며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를 호출한 ‘검은 갈매기’ . 413

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 검은 갈매기는 영일만 바닷가 흙 속으로 . 419

작가의 말 . 3 

본문인용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 그날, 한흑구는 어린 아들 셋을 앞세우고 네 살 먹은 딸을 아내와 번갈아 업으며 자갈 깔린 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이튿날은 동래 온천교(溫泉橋) 밑에 닿았다. 피난민이 노숙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늘어질 지경이었다. 곧 인민군이 쳐들어온다는 포항을 떠나서 꼬박 한 주일이나 걸었으니. _13쪽

 

모란봉에는 모란꽃이 피지 않는다. 모란이 없기 때문이다. 한흑구는 현실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모란봉에는 언제나 모란꽃이 피어나는 중이다. 모란봉이란 피어나는 모란꽃을 닮아서 매겨진 이름이라니! _17쪽

 

평양의 문학청년에게 경성은 낯선 도시였다. 안국동 학교와 가까운 경성 번화가를 눈여겨보고 지리도 익혀둬야 했다. 1928년 4월의 경성 거리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한세광은 완상의 느린 발길을 옮겼다. 청계천변에는 빨래하는 아낙들이 섬돌처럼 쪼그려 앉았고, 방물장수 노점에는 손님들이 구경 반 흥정 반 꼬여 들었다. 종로통을 거닐었다. 3·1운동의 심장부였던 탑골공원을 둘러보고 화신상회, 보신각을 눈에 담아 3층 건물의 동아일보사에 닿았다. _36쪽

 

시카고 한인교회에 모인 동포들 앞에서 비장한 시 암송으로 3·1운동 10주년을 기리고 되새긴 한흑구(세광)는 루이스 인스티튜트에 다니면서 시카고의 첫 계절을 지나게 되었다. 봄날의 새움처럼 돋아나는 시 창작의 열정을 종이에 받아내는 청년시인이 무엇보다 영어 공부에 주의를 기울이는 날들이었다. 평양 학창시절부터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영어를 익혔지만 청취력(listening), 말하기(speaking), 쓰기(writing), 이 삼박자를 미국인 대학생과 버금갈 만하게 제대로 갖춰야 대학에 들어가도 낑낑대지 않으며 영문학을 공부할 것이었다. _52쪽

 

1931년 11월호부터 잇따라 네 번째로 《동광》에 등장하는 ‘한세광’, 1932년 2월호 《동광》에 그는 조선 문단에 처음으로 평론을 발표했다.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였다. 이것은 한국문학사에 올려놓은 최초의 미국 흑인문학이기도 했다. _103쪽

 

1933년 가을학기에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학에 다니는 한흑구는 여가를 만드는 대로 며칠씩 캘리포니아 포도밭이나 텍사스의 드넓은 들판, 아리조나며 네바다며 황막한 사막을 방랑의 발길로 떠돌았다. _175쪽

 

1945년 봄날에 한흑구는 장남 동웅을 소학교(초등학교)에 넣었다. 1942년 《조광》에 수필 「농촌 춘상」을 발표하고는 아예 펜을 놓아버렸다. 지면에 이름을 내면 그만큼 친일문학의 대세에 합류하라는 일제의 강요와 회유가 드세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척추로 형성된 신념과 맹세를 지키는 방법의 하나가 절필이라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_244쪽

 

흑구, 검은 갈매기, 그러나 포항 송도, 영일만 바다에는 흰 갈매기들이 너울너울 날아다닌다. 감정이입이란 말이 있다. 갈매기에게 한흑구는 방랑을 이입했다. _368쪽

 

바야흐로 자연의 섭리를 받아 흙으로 돌아갈 예감에 마지막 남은 생을 맡겨둔 한흑구,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그의 삶과 정신에 굳건한 뿌리의 하나였던 도산 안창호. 머잖아 영일만 갈매기들에게 작별의 느린 손짓을 보낼 한흑구가 끝내 잊지 못한 도산 안창호의 이상(理想), 그가 도저히 이루지 못한, 아니 어떤 혁명가도 선지자도 메시아도 이룰 수 없는 그것은 어떤 세상인가? _416쪽

 

서평

20세기의 한반도, 대공황기의 아메리카에 새겨진 ‘한흑구 아리아’ 93편!

‘단 한 편(片)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를 위한 Aria 93편!

 

한흑구 탄생 115주년을 맞는 2024년 늦봄,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93편의 작은 이야기로 엮어낸 책이 나왔다. 편마다 인용한 작품과 그 상황을 통찰한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마치 해설을 곁들인 아리아 93곡을 감상하듯이 읽을 수 있다. 〈Han’s Aria 한흑구 아리아〉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모란봉에 모란꽃 피면 평양 가겠네』이다. 저자는 포항 출신으로 『박태준 평전』도 쓴 이대환 작가(66세)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한흑구(본명 세광, 世光)는 숭인학교를 나와 1929년 2월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중퇴한 데 이어 5년여 미국 유학을 하고 시인, 소설가, 수필가, 번역가로서 1934년 봄날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신문은커녕 잡지 하나 없는 ‘조선 제2 도시 인구 16만 평양’의 전근대적 현실을 개탄하며 종합지 《대평양》, 《백광》 창간과 발행을 주도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운데 1937년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한승곤(아버지) 등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부터 평양을 떠나 평남 강서군 산골에 칩거하며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친일문학연구자 임종국)로 남았다. 그러나 해방된 고향(평양)이 적도(赤都)로 바뀌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38선을 넘어 1945년 9월 서울 문단에 합류했다.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지내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늦가을부터세속적 명리와 등지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영일만 바닷가 포항에 정착하여 인생 후반기 서른한 해에 걸쳐 갈매기와 바다의 언어를 영혼에 담는 ‘은둔의 사색가’로서 문학적 정혼을 수필 창작에 기울였다. 그의 바람대로 포항제철(포스코)이 ‘조국의 번영’을 이끄는 ‘영일만 신화’를 완성한 즈음인 1979년 11월, 70세 일기로 자택에서 고요히 영면에 들었다. 

 

책 제목은 첫 번째 아리아 〈애인보다 가까운 조지훈과 함께/다시 모란봉에 올라보고 싶지만〉의 한 문장에서 따왔다.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에 41세 한흑구는 아내와 같이 어린 자녀 넷을 데리고 포항에서 출발해 꼬박 한 주일을 걸어 부산의 동래 다리 밑에 닿았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피난의 고행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수영비행장에 주둔한 미군 지휘부의 통역관이 되어 공초 오상순, 조지훈, 청마 유치환 등 종군 문인들의 저녁 술자리를 책임지는 임무에 충실히 나선다.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문인 대표들도 평양으로 날아가게 되자 조지훈은 평양 토박이 한흑구에게 동행을 강권한다. 이때 그가 사양하는 말이 이랬다. “나는 모란봉에 모란꽃이 피면 평양에 가겠네.” 이 장면을 저자는 이렇게 읽어낸다.

 

그날부터 한흑구는 평양을 영혼으로만 살아가야 했을까. 모란봉에는 모란꽃이 피지 않는다. 모란이 없기 때문이다. 한흑구는 현실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모란봉에는 언제나 모란꽃이 피어나는 중이다. 모란봉이란 피어나는 모란꽃을 닮아서 매겨진 이름이라니!  

 

두 번째 아리아는 〈아버지는 창끝에 찔려 넘어졌고/나와 동무는 도망하여 나왔노라〉이다. 한흑구가 열 살 때(1919년) 경험한 3·1운동을 24세의 미국 유학생이 되어 1933년 3월 9일 《신한민보》에 발표한 시 「3월 1일」을 인용하고 있다. 세 번째 아리아는 〈함박눈 내리는 날 지게꾼이 오고/어머니는 소리 없이 울었네〉로, 한흑구가 일곱 살이었던 어느 날에 아버지(한승곤)가 중국(상하이)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떠나는 장면이다. 이후로는 그의 유년시절부터 1979년 11월 그의 임종과 장례를 담은 아흔세 번째 아리아 〈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검은 갈매기는 영일만 바닷가 흙 속으로〉까지가 시계열에 어긋남 없이 빠짐없이 그의 작품을 현장의 증언처럼 인용하면서 정연하게 이어진다.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는 네 번째 아리아 〈‘High thinking, plain living’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혜성’을 결성해 문학의 길로〉의 소년 한흑구에서부터 1934년 봄날에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미국 유학을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횡단 여객선 ‘후버’호에 오르는 서른일곱 번째 〈한글 시 200편과 영시(英詩) 100편을 쓴 청년시인이/최초로 필명 ‘흑구’를 《신한민보》에 올리고 나서〉, 평양 자택에 도착한 한세광(흑구)의 소식을 알려주는 서른여덟 번째 아리아 〈‘심장의 노래’를 다짐한 청년시인의 귀국 소식을/《조선일보》가 크게 특필하다〉, 서른아홉 번째 아리아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문학의 길로 정진하겠다는 한흑구의 자화상〉까지는 주로 그의 시를 불러들이고, 마흔 번째 아리아 〈‘헐어지는 집’에 돌아와 휘트먼을 호출하고/16만 평양시민의 종합지 《대평양》을 창간하다〉부터는 주로 그의 산문을 불러들인다. 한흑구의 문학이 귀국, 귀향을 계기로 산문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1948년 늦가을에 세속적 명리를 멀리하는 한흑구가 솔가하여 낯선 땅 포항에 출현하는 모습은 예순한 번째 아리아 〈포항시 남빈동의 낡은 집을 둥지로 삼는/검은 갈매기〉에 담겨 있다. 포항에 정착한 그는 월트 휘트먼, 칼 샌드버그, 랭스튼 휴즈 등 미국 대표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번역시집 『현대미국시선』을 펴내고(1949년, 서울 선문사), 세계적 음악가로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를 작곡한 안익태를 가형처럼 도와주며 함께 지냈던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유학 시절을 A와 K라는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젊은 예술가」도 발표하지만(1961년 《새길》, 법무부 간행), 1955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적 수필의 명작 「보리」가 보여주듯이 문학적 정혼을 수필 창작에 기울이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 《영남일보》 《현대문학》 《시문학》 《수필문학》 등 다양한 여러 매체에 많은 수필을 발표했다. 그 결실이 회갑도 넘겨 1971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주선으로 생애에 처음 펴낸 작품집(수필집) 『동해산문』과 두 번째 수필집으로 1974년에 펴낸 『인생산문』(서울 일지사)이다. 한편으로 한흑구는 포항수산대학 교수로서 후학을 길러내며 이명석, 김대정, 박영달, 최성소, 김녹촌, 손춘익 등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손을 잡고 전후의 폐허를 극복하는 포항에서 ‘흐름회’를 조직해 학생백일장을 주최하고 황순원, 이원수 등 친분이 두터운 문학인들을 초청해 문학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문학운동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미국 유학,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에 남겨둔 한흑구의 문학적 자취에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는 음악가 안익태와 함께 보낸 시간, 최초로 조선문단에 올려놓은 미국 흑인문학과 주목할 수필문학론, 그리고 소설가 이효석, 시인 유치환·조지훈·서정주 등 문우들에 대한 추억담이다. 

 

‘청년시인 한흑구와 청년음악가 안익태’는, 1933년 2월 신시내티에서 추방 위기에 몰린 빈털터리 안익태가 첼로만 들고 돌아갈 여비도 없이 필라델피아 정거장에 나타난 장면을 담은 스물여덟 번째 아리아 〈갈 곳 잃은 안익태가 첼로만 들고/필라델피아 한흑구의 셋방에 들다〉부터 서른일곱 번째 이리아 〈안익태의 ‘고립’을 넘어선 런던 편지와/‘독립’을 이룩한 연미복의 지휘봉〉까지 내리 이어진다. 

 

한흑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문단에 최초로 미국 흑인문학을 올려놓았다. 스물네 번째 아리아 〈한국문학사에 최초로 흑인문학을 올려놓으니/조선 문단은 데면데면 엑조티시즘으로 여기고〉에서 그 단면을 알려준다. 1932년 2월호 《동광》에 한세광의 이름으로 발표한 평문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가 그것이다. 앨런 로크(Alain Locke)가 편집한 문학선집『뉴 니그로』가 그 텍스트로, 『뉴 니그로』는 ‘니그로 르네상스’ 촉발의 한 자극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흑인의 상황에 식민지 조선인의 상황을 대입한 한흑구는 당시 대표적 흑인 시인 랭스튼 휴즈의 시 ‘우리는 우리의 해가 돋는/우리의 땅을 가져야 한다’라는 「우리의 땅」도 번역해 소개했다. 하지만 조선 문단은 ‘미국 니그로 문학’을 이국적인 정서나 정취에 탐닉하는 엑조티시즘 정도로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한흑구는 미국 흑인의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흑인문학을 일생 동안 가슴에 간직했다. 1937년 5월 《백광》에 발표한 그의 단편소설 「황혼의 비가」에도 흑인문제를 포함한 인종 차별의 현장이 생생히 등장한다. 흑인을 노예처럼 동원한 텍사스 목화농장에서 노동을 팔아 학비를 준비하는 한인 고학생 ‘나(김)’와 ‘박’이 겪은 이야기를 그려내는 「황혼의 비가」는 마흔네 번째 아리아 〈암탉이 달걀을 품듯이 소설을 창작하며/다시 ‘황혼의 비가’를 듣다〉에서 들려주고 있다.    

 

한흑구는 일제강점기 한국 수필문학의 선구자로서 특히 영미 에세이의 역사와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통찰한 지식을 바탕으로 단단한 ‘수필문학론’을 피력했다. 쉰아홉 번째 아리아 〈문학의 장르로서 수필의 독자적 가치와 양식을/한국문학사에 개척하고 정립하다〉에서 그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흑구 아리아에는 가까이 지낸 문인들과의 농후한 추억들이 담겨 있다. 마흔아홉 번째부터 예순네 번째 사이의 〈낙엽을 태우며《백광》에는 수필만 넘겨주고/평양냉면을 싫어한 소설가 이효석〉, 〈일제 검열관이 빨갛게 지워버린 방송 원고와/노총각의 결혼〉, 〈해방공간의 한흑구가 서울에서 대작한/대주가(大酒家)급 문인들〉, 〈한흑구의 영혼에 ‘생명의 서’를 새기고/‘바위’로 남은 청마 유치환〉, 〈푸른 자기(磁器)의 선(線)에서/슬픈 역사를 읽어낸 지훈이여〉, 〈“한 형, 나 아직 주정 안 했지?” 하고/히히 웃는 ‘귀촉도’ 시인〉 등이 그것이다.  

 

마흔 살을 앞두고 솔가하여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는 ‘향수’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전후 폐허의 포항을 재건할 때는 미군의 도움을 불러오는 일을 조용히 해내고, 다시 일어서는 포항의 기상을 전국에 알리는 글을 쓰는가 하면, 문학적으로 척박한 터전에 씨앗을 심고 밭을 가꾸는 일에도 앞장서는 가운데, 일찍이 1935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수필문학론’을 분재한 당시에 “나는 조선문단에 수필문학의 새 기운을 촉진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던 자기 다짐을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 시적 수필의 명작으로 빛나는 「보리」, 「노목을 우러러보며」 등을 남겼다. 

 

그러나 70세에 다가서며 생의 종점을 예감하는 한흑구는 가슴 깊이 봉인해둔 향수 주머니의 실밥이 터져 버린다. 그래서 글로 만든 ‘평양 안내지도’라 불러도 손색없을 「모란봉의 봄」 같은 수필을 쓴다. 아흔 번째 아리아 〈꽁꽁 봉인해둔 침묵의 향수(鄕愁)에/속절없이 그만 실밥이 터지고〉이다. 저자는 이렇게 읽어낸다. 

 

자주 말하는 애절한 그리움도 있을 수 있다. 길게 말하는 애절한 그리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안으로 안으로 우겨넣으며 깨물고 또 깨물어 견고한 침묵 속에 봉인해두는 애절한 그리움이 있다. 이것이 한흑구의 ‘평양 향수’였다. 그러나 애절한 그리움을 완벽하게 봉인해줄 침묵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봉인의 실밥이 속절없이 터져 버리는 찰나를 맞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항 바닷가를 거닐며 황혼의 시간에 쓴 수필「나는 한 마리 갈매기요」에서 한흑구는 스스로 ‘갈매기’로 등장하여 드디어 갈매기는 떠돌이 방랑자가 아니라 터를 잡고 정착한 새라고 불러준다. 그가 발표한 마지막 글은 1979년 10월 《샘터》에 실린 「신용이 광고다」이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 정신을 선양한 것이기도 했다. 아흔두 번째 아리아 〈갈매기같이 살겠다며 마지막으로/도산 안창호를 호출한 ‘검은 갈매기’〉가 그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한흑구는 1979년 11월 지상의 마지막 음식으로 냉면을 맛보고 나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택 자리는 영일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항시 죽천리 언덕이었다. 아흔세 번째 아리아 〈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검은 갈매기는 영일만 바닷가 흙 속으로〉이다. 겨울을 예감하는 하늘이 눈 시리게 푸른 빛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은 영일만 바다,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 위로는 갈매기들이 꺽꺽한 소리로 서로를 부르며 마치 오랜 친구와 영영 헤어지는 영결의 슬픔을 나누는 것 같은 그때, 음유시인의 풍모를 갖춘 대중가수 최백호의 노래 〈영일만 친구〉는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젊은 날 푸른 가슴’과 가슴을 타고 이 나라 방방곡곡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중이었다. 갈매기 나래 위에 인생과 문학과 세계에 대한 사유의 언어를 띄우고 띄우고 또 띄운, 최초의 진정한 ‘영일만 친구’는 필생의 그 과업을 내려놓았고…….  

 

이대환 작가는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는 저명 작가마저 상업적, 정파적 이유로 그의 뽐내는 말과 그의 삶이 서로를 배반하는 경우가 흔해 빠진 통속의 무대다. 일제강점시대의 평양, 대공황기의 미국, 해방공간의 서울, 전쟁ㆍ전후(戰後) 분단시대의 포항에서 핍박과 궁핍의 세월을 빳빳이 관통해온 선생의 궤적은 말과 삶의 일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참으로 귀중한 유산이다. 그리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363킬로미터이고 백두산까지래야 두 배도 못 되는 672킬로미터인데, 언젠가 평양 사람들이 포항에 와서 선생을 기억해주고 남녘 사람들이 모란봉에 올라가 선생을 추억할 그날이 올 것이라 믿고 기다리며 이 책을 선생의 영전에 바친다.”

저자소개

저자 : 이대환
1958년 영일만 바닷가(현 포항제철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흐름회’ 백일장에서 받은 상장의 ‘한흑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0년(대학 4학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주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 당선해 소설가로 출발하고 졸업과 함께 귀향하여 십여 년간 교사와 대학 강사로 교편을 잡았으며, 1989년 선배들과 포항지역사회연구소를 결성하고 종합지 《포항연구》를 창간해 통권 55호까지 발행했다.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을 좋아하고, “시민단체는 자기 세대에 걸맞은 새로운 탄생이 바람직하다”며 시민단체 대물림에는 반대했다.
1989년 《현대문학》 지령 400호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해 연재하면서 1990년 가을호 《창작과비평》에 중편소설 「철의 혀」를 발표한 뒤부터 전업작가로 지내기도 하며 십여 년간 소설 창작에 열정을 바쳤다. 평전과 소설에 힘을 기울이며 드문드문 칼럼을 쓰는 현재도 서른 살 언저리에 깨달았던 ‘이념이 인간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이 이념을 창조한다’라는 것을 변함없이 진리로 생각하고 있다.
평전 『박태준 평전』, 『청년의 꿈 박태준』, 소설집 『조그만 깃발 하나』, 『생선 창자 속으로 들어간 詩』, 장편소설 『말뚝이의 그림자』, 『새벽, 동틀 녘』, 『겨울의 집』, 『슬로우 불릿』, 『붉은 고래』, 『큰돈과 콘돔』, 『총구에 핀 꽃』, 산문집 『프란치스코 교황과 무지개』, 『하얀 석탄』 등을 펴냈으며, 『포항사회의 진단과 전망』, 『누가 어떻게 포항지진을 만들고 불러냈나?』, 『포스코는 국민기업이다』 등을 엮어냈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