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그려낸 생의 이정표,
마음의 지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소망이랄까 숙제랄까, 해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결행 날짜를 12월 25일로 잡았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잡힐 리 만무다. 용산 기준으로 일몰 시간이 오후 5시 19분인 것도 확인했다. 카메라를 챙기고 편한 신발로 집을 나섰다. 내 행선지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 탐정 놀이하던 아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갈월동에서 152번 버스로 환승하여 ‘한강대교 북단 LG유플러스’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하늘은 흐리지만 날씨는 포근하고 미세먼지 예보도 보통으로 나온 날이다. 심호흡을 한 후 걸음을 남쪽으로 옮겼다.”
『하룻밤에 한강을 열 번 건너다』는 평생을 연구자로 살아온 조효제 교수가 처음으로 펴내는 기억록이다. 저자는 말 그대로 한강 다리를 열 번 오가며 오랫동안 품고 있던 숙제를 결행한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떠오르는 기억들은 어릴 적 살았던 동네, 생전 처음 가보았던 외국 아일랜드, 매일 걸어서 오갔던 보스턴의 다리, 자신의 ‘두번째 동네’라고도 할 수 있을 템즈강 남동쪽의 그리니치,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십 년 전 일들이, 신기하고 놀랍기도 하고 후회스럽고 괴롭기도 한 옛 기억들이 저자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책에는 그렇게 모인 세월의 조각들이 기록되어 있다.
“바람이 더 세졌다. 한기가 닥치니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 아주 오래전 이 다리를 건넌 적이 있었다! 사십 년쯤 된 것 같다. 서울 토박이 친구를 감언이설로 회유하여 겨울밤에 한강대교를 건넜다. 서울역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즉석에서 결행한 일이었다. 눈을 못 뜰 정도로 바람이 매서웠다는 기억이 훅 올라온다.
정말 이상하다. 한강대교를 꼭 걷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예전에 건넜던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게 기억이다. 기억은 일기장에 적힌 손글씨와는 다른, 액체와 고체 사이의 중간쯤 되는 물질이다. 무엇이 그 기억을 억누르고 있었던가. 기억이 이토록 가변적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규정하(는 것처럼 기억되)는 인생사도 환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팩트도 아닌, 내 꿈과 나비 꿈이 뒤섞인 캔버스란 말인가.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또 하나의 강줄기가 기억의 흐름 위로 올라온다. 내가 건너본 강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가라앉아 있고, 가장 서글펐던 물길, 소와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