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진짜로’ 의도한 바를 밝히기는 어렵다. 이게 도그휘슬이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맥락을 충분히 알기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표면적 의미와 진짜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도그휘슬에는 ‘그럴듯한 부인’이 확실하게 장착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저의를 알아차린다 해도 그런 뜻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 그런 거다”, “남의 말을 곡해했다”, “피해망상 아니냐”라고 받아치면 그만이다. _ p. 75
무화과잎이 그토록 잘 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표현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결과보다 표현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극소수 악인들의 전유물로 본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든가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면, 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는 건 지나쳐 보인다. _ p. 84
‘남자는 쓰레기다’는 남성성에 피해 입는 사람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며, 단순한 발화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요구로 보아야 한다. …… 이것을 혐오 표현이라고 주장하거나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핵심을 놓쳤다. 누군가가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했다면 그는 성적 괴롭힘과 남성성을 연결 지은 것이다. 이것은 혐오 행위가 아니라 규명 행위다. _ p. 110
‘남자는 쓰레기다’는 총칭적 일반화다. 이 진술은 모든 남자가 쓰레기라는 뜻이 아니라 쓰레기스러운 특성과 남성이라는 특성 사이에 우리가 주목하고 깊이 생각해볼 만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 상관관계의 증거는 넘쳐나고, 이는 남자들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된다. 또한 이 문구는 일종의 도발이자 도덕적 비난과 저항의 진술로서 기능한다. _ p. 119
요컨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 한 번 쓰면 그만이고 무시해도 괜찮은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 흑인의 고통과 죽음은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수감자, 경찰 총격 피살자, 굶주림이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병 때문에 단명하는 사람 가운데 흑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흑인은 자유, 생필품에 대한 접근성, 공정한 대우를 부정당할 가능성이 세계 어느 집단보다도 높다. _ p. 133
만약 현재 논의되는 중대한 질문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한가?’라고 가정한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매우 합리적인 대답이고 다른 생명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 하지만 논의되는 질문이 ‘어떤 생명이 소중한가?’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가 더 합리적인 대답이기 때문에 거리에 울려 퍼지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가 혼란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인종적 정의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구호의 발화가 현재 작동 중인 시스템을 공연히 교란하거나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본다. pp. 149~150
신뢰할 만하다고 인지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뢰할 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들은 취업을 하고, 직장에서 존경받고, 논쟁에서 이기고, 소셜미디어에서 팔로어를 얻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고, 경찰과 법원에서 진지하게 존중받고, 정치나 언론 같은 공적 영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_ p. 166
학대당한 여자가 느끼는 공포보다 누명을 쓴 남자가 느끼는 공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걸핏하면 여자 쪽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부터 하고 본다. 인생의 다른 어떤 경험도, 다른 어떤 범죄도, 이처럼 요란하고 자동적인 의심과 이처럼 억지스러운 공감부터 만나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경고 사례가 되어버리기에 우리는 침묵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_ pp. 184~185
‘정치적 올바름’은 우파의 도구로 포섭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주목받는 이력을 쌓아 왔다. 정치인들과 보수 칼럼니스트들은 주변화된 집단들의 요구나 선호를 고려해야 한다는 신호가 보이면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규탄하는 것으로 반응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형태의 재미를 망치는 것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항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코미디, ‘악의 없는 농담’, 코스튬 파티, ‘영국적 가치’, 섹스의 즐거움에 언제 찬물을 끼얹을지 모르는 유령 취급을 한 것이다. _ pp. 234~235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반흑인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N단어를 삼가세요”라는 말과 “이러다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살겠네”라는 주장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비약은 수시로 일어난다. 여성들이 성적 괴롭힘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듣고서 이런 세상에서 섹스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다고 상상해보라. …… 더글러스 머리의 “이제 섹스도 못 하겠네”라는 급발진은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롭고 달갑지 않은 발상 앞에서 금세 과장하고 비약하는 방식의 전형적 예다. _ pp. 250~251
어느 한 국가 혹은 산업의 생태 발자국 개념은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개인의 ‘탄소 발자국’은 2000년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 이유는 영국의 석유 기업 ‘브리티시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BP)’이 광고홍보기업 ‘오길비&매더(Ogilvey&Mather)’에 의뢰하여 기후 변화의 책임이 화석 연료 회사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공론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2004년에 BP 홈페이지에는 사용자 친화적인 탄소 발자국 계산기를 자랑스럽게 내놓았고, 결과적으로 1일 원유 생산량이 370만 배럴인 대기업의 홈페이지에서 보통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측정해보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_ p. 326
책임을 개인화할 때 함정을 염두에 두되 극단적인 그 반대의 경우도 경계하여 구조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우리 자신을 너무 가벼이 봐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구조적 문제를 너무 자주 들먹인다는 것은 종종 추상적이고 무정형적이며 극복할 수 없는 힘을 지목한다는 의미다. …… 우리는 구조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과장 없이 인정하는 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행동에 그리 영향받지 않지만 그 행동들의 총합으로써 영속화된다. 그와 동시에 각 개인은 오직 자신의 행동만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_ p. 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