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게 맛있더라. 여기 와서 처음 먹어 봤어.”
누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포카리스웨트 캔을 보여 주었다.
“진짜? 누나 외국 살다 왔어? 어떻게 포카리를 스무 살이 넘도록.... 아,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태어나서 이건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혹시 누나가 민망해할까 봐, 나는 서둘러 컨피던스라는 음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다음에는 저걸 마셔 봐야겠다. 포카리스웨트보다 맛있으면 좋겠네.”
“다음에 같이 마셔 보자. 누나, 그거 이리 줘 봐. 내가 따 줄게. 자... 여기.”
“고마워, 윤아.”
누나가 웃으며 캔을 받아 들었다. 그 웃음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내 하루가 다 저물어 버
려도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욕심을 내 볼 생각이었다. 나는 소리 죽여 목을 가다듬고는, 어젯밤
수백 번 연습했던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완성한 문장이었다.
“누나, 우리 한강으로 산책 갈래? 날씨도 좋으니까.”
- 30~31p
“저기! 혹시....”
영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손길로 노란색의 신의 팔목을 잡았다. 반쯤 돌아섰던 노란색
의 신이 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영은 노란색의 신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신의 눈동자
또한 머리칼처럼 찬란한 노랑으로 빛났다. 영의 귓가에 치이이익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노란색 스위치가 당긴 불이 어느새 눈에서 마음으로 옮겨붙은 것이었다.
“그, 저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른 이유는 아니고요, 제가 노란색을 꼭 봐야 할 일
이 있어서요.”
영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손은 여전히 노란색의 신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아, 네.... 좋아요.”
노란색의 신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영의 눈빛에 저항할 틈도 없이 무너져 버렸다. 영에
게 잡힌 팔목이 뜨거웠다. 신에게도 맥박이 있었다면, 그 부근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 65p
“서현은 왜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했어? 외계 종족의 존재를 의심할 수도 있었을 텐
데.”
“메로는 별걸 다 궁금해하네. 호기심이 참 많은 외계인이야.”
“서현, 외계인이라는 말보다는 카뎀이라....”
“믿고 싶었거든.”
나는 별이 빼곡한 하늘을 가리켰다.
“이 지구에는 없더라도, 저렇게 크고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나를 좋아해 줄 존재가 하나쯤
은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저 별들을 다 헤치고 나에게 날아와 줄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
면 그렇게 믿길 참 잘했어.”
“그 메시지가 서현에게 닿아서 정말로 다행이야.”
- 153p
“이 사건에 당신이...?”
“이제 좀 말이 통하겠네. 내가 사라지고 나면 당에서는 당신을 찾으려 들 거야.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 할 테니까. 신나게 고문하다가 결국에는 죽이겠지.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든가.”
“당신이 외계인이든 간첩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어쨌든 당신을 우주 끝까지 따라
갈 거야. 그만큼 사랑하니까!”
정훈은 처음 만난 날부터 한결같이 끈질겼다. 위장 취업한 회사에서 만난 정훈은 민정에
게 첫눈에 반했다며 졸졸 따라다녔다.(당시 민정은 주머니에 든 나이프를 꺼내야 할지 심
각하게 고민했었다.)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정훈은 마음을 꺾지 않았다. 그러다 당에서 신
분 위장 강화를 위해 결혼을 지시했고, 별수 없이 가장 빠르게 결혼할 수 있는 상대인 정훈
을 고른 것뿐이었다. 이런 내막을 알 리 없는 정훈은 그날 이후로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노★ 력하면 이루어진다♥ ’로 바꾸었다.(그리고 6년 동안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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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