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부터 저는 놀이공원에 가는 것보다, 오락실에 가는 것보다 모더니즘 건축물을 보러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다소 특이한 어린이였습니다.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건축 실물을 많이 보라.”고 답합니다. 책을 읽는다거나 건축 잡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건축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축 실물을 접하고 그 공간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수만 권의 책을 읽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29쪽 「동물 애호에서 건축 애호로」 중에서
그때까지의 인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뭔가’를 들은 대로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날에 시험이 있고, 정해진 날까지 도면이나 논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도 아직 모든 것을 남이 정한 규칙대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라 연구실에 들어가 처음으로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남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학교가, 선생님이, 상사가, 회사가 말하는 대로, 명령한 대로 인생을 끝냅니다. 계속 불평하면서도 들은 대로 살고 있습니다. 명령을 듣는 일이 없어졌을 때는 이미 정년이 되어 있어 앞으로 뭔가를 시작할 수도 없는 때늦은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92쪽, 「꿈꾸던 아프리카 여행이 가르쳐준 것」 중에서
어느 시대나 건축은 시대의 거울입니다. 그것이 거울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잘 보입니다. 첨단 디자인으로 보였던 모더니즘 건축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졌고, 특히 공업화의 챔피언이었던 미국에서는 폭발적인 기세로 모더니즘 건축물이 건설됩니다. 특히 미스 반데어로에는 자신이 교장을 했던 혁신적인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가 나치에 폐쇄당한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유럽 시절에는 그림만 그렸을 뿐이고 실제로는 실현하지 못했던 초고층 유리 건축물을 제2차 세계대전 뒤 호경기를 구가하던 미국에서 차례로 실현해 갑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건축 문화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118쪽, 「미국 유학에서 깨달은 일본의 매력」 중에서
저는 다행히 늦게 출발하여 1980년대 세상의 흐름 전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세련’됨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원히 ‘세련’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세련’된 것은 내일이 되면 촌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 그 영구불변의 대원칙을 보지 못하기 십상입니다. 건축에 뜻을 둔 젊은이는 꼭 지금의 ‘세련’됨에 현혹되지 말고 짓궂은 눈, 삐딱한 눈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150쪽, 「첫 건축, ‘탈의실’ 같은 이즈의 집」 중에서
창피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도전의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현장에서도 계속 물어봅니다. “그러한 것도 모릅니까?”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기가 죽지 않습니다. 창피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디테일과 디자인을 그저 되풀이하게 됩니다. 현장에서는 창피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86쪽, 「예산 제로의 건축, 돌 미술관」 중에서
확실히 건축과 음악은 무척 닮았습니다. 둘 다 리듬이 있고 음색이 있으며 멜로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흐르는 것이고 건축은 얼어붙어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건축 또한 흐르는 것이지 얼어붙어 있지 않습니다. 근대 유럽에서 건축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이용해 건축을 말하거나 평가하는 방법이 일반화되면서 건축은 얼어붙어 있다는 오해가 생겨난 것입니다. 실제 건축은 하나로 이어진 연속된 시간적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화나 사진에서 얻을 수 있는 체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거기에 이르러 가까이 다가가고 안을 돌다 다시 떠나가는 시간의 흐름이야말로 건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장소로 가서 그곳에 흐르고 있는 독특한 리듬과 음색을 들어보려는 것입니다.
197-199쪽, 「일본의 시골에서 세계의 시골로, 중국의 대나무 집」 중에서
평판을 소중히 하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설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 시대이기에 더욱 주변 평판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평판을 쌓아가야 비로소 큰 건축을 설계할 기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 시대의 건축가에게는 장거리 주자로서 주변에 두루 마음을 쓰며 오랫동안 계속 달릴 수 있는 자질이 요구됩니다. 장거리 주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씩 신용을 얻도록 노력하고 그것이 쌓여가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건축을 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
습니다.
223쪽, 「상자형 이후의 건축을 찾아서」 중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을 체험한 뒤 앞으로 건축의 과제는 ‘큰 상자’를 어떻게 해체할까 하는 것입니다. ‘큰 상자’는 콘크리트, 철이라는 딱딱하고 무거운 소재로 가능했습니다. 반대로 코로나 이후에는 나무, 천, 종이라는 부드럽고 가벼운 자연 소재로 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축물을 짓는 것이 테마가 됩니다. 인간을 자연에서 멀어지게 하고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계속 주었던 콘크리트나 철의 건축에서 자연과 일체화하는 부드러운 건축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카사 엄브렐러는 그런 시대의 건축을 탐색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해도 좋겠지요.
244-245쪽, 「나가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