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달래느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날이다”
누구에게도 건네 본 적 없는 말들로 가득한
당신의 천국어 사전이 두툼해지면 좋겠다
2022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한 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이 타이피스트 시인선 003번으로 출간되었다. 데뷔 당시 이문재, 이수명 시인으로부터 “자기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도 기교를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힘이 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 조성래 시인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상처들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결핍과 죽음으로 점철된 자전적 이야기들로 서정시의 새로운 계보를 기대하게 한다.
등단 당시 인터뷰에서 “시를 위해 허구의 내 모습을 만들지 않겠다”고 밝힌 것처럼 매 시편마다 언어적 기교보다 몸으로 체득한 경험으로 삶의 근원적인 슬픔에 질문하고 애도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젊고 가난했던 마음에 용서를 구하는, 도망쳤지만 결국 제자리였던 고단한 청춘의 비망록이며,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절망하고 상처 입은 당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는 기도문이다. 아프고 따뜻한 빛으로 펼쳐지는 천국어의 첫 시작이다.
가난한 마음에도 사랑한 적 없는 마음에도
지긋한 생활을 맨몸으로 맞으며
K가 사라진 이후 내 영혼은 그대로 허공에 업힌 자세다 몸만 멀쩡히 길거리를 돌아다닌다 밥을 먹는다 가끔 친구를 만나 웃다가 또 울지만, 내 영혼이
없는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나는 결코 이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자유무역 3공구 정류소에서」 중에서
시청에서 문자가 온 날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성산구라면 일진테크가 있는 봉암공단과 이웃해 있는 동네, 큰일났구나 나는 내가 보조로 있는 라인의 용접공 필리핀 소녀 윤희를 떠올렸다 하루아침에 공장을 멈추는 힘이란 대체 무엇일까
-「완싱」 중에서
매일 아침 여섯 시, 조성래는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 통근 버스를 타고 외국인 노동자들과 고된 노동을 한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함에 공장이 숨을 멎는 것보다 숨 막히지 않았다는 고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픔의 세계 쪽으로 더욱 강렬하게 움직인다. 이렇듯 조성래는 마음이 아프고 가난해도 생활의 거대함 앞에서 생활을 멈추지 않듯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처절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증명하고 보듬어 주는 문장들은 시인이 몰두하는 속죄의 과정에서 참혹하게 빛난다. 비극적 현실 앞에서도 지긋한 생활을 맨몸으로 맞으며 삶의 자세를 곧추세우고 쥐어 보지 못한 시간을 그러모으는 것은 시인의 거울이자 세계의 창문인 시가 유일한 숨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핍과 반성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하루의 슬픔을 달래는 기도문
내가 나를 달래느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날이다
내가 나를 응원할 힘이 없는 날이다 내가 나를
슬퍼하기를 뚝 그친 날이다 나는
나의 밖에 내놓아졌다
-「기타노 블루」중에서
라면 스프를 조금 남겨 두었다가
밥을 비벼 주곤 하셨다는
네 부모의 이야기
(……)
짜게 먹는 게 좋다던 너의 말도
또 이런 걸 쓱쓱 비벼 자식 앞에 놓던
네 부모의 심정 같은 것도 떠올려 보다가
게걸스럽게 두 공기를 비우고 나서는
슬그머니 내일이 걱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시절」중에서
결핍과 반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로 자신을 달래는 시인의 나직한 고백은 또 하루치의 무게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동시에 “순수를 동경하는” 천국어로 다가온다. 또한 세계의 거대한 절망과 폭력 앞에서도 시인은 편의점 계산대에서 한 무리 학생들의 계산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그 이면에는 한결 깊어진 눈빛과 손길이 있다. 그 눈빛과 손길로 어머니의 간병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졸면서도 이성복의 시집을 읽는다. “폭력은 죽여도 죽여도 솟구치는 귀뚜라미들의 하수구”라는 오랜 시간 길들여 온 문장 위에, 세계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조성래의 정직한 경험의 힘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부터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시인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누구에게도 건네지 못한 〈천국어 사전〉이 두툼해지길 바란다. 그 단어들은 혼자만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 따뜻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