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찍는 순간은 모든 감각이 집중한다. 숨도 잠시 참아야 한다. 흔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겠지만 그 순간은 오롯이 저 너머의 꽃과 나만의 순간이다. 무념무상 완벽하게 단순하다. 하릴없이 분주한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 순간의 침묵은 눈앞에 보이는 수백 수천의 사물을 넘어 ‘없음’의 순간으로 정신을 인도한다. 그런 시간들이 위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힘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004-005쪽, 들어가는 글
다만 고통을 바라보고, 고통이 미지의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되 고통이라는 배에 내 마음을, 온통 담아 같이 흘려보내지는 않기를. 만에 하나 악이, 불의가 눈앞에서 승리하는 것 같을 때라도 절망하지 말라고, 마음의 뿌리를 다치지 말라고,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눈 속에 피어 있는 꽃들이 가르쳐주는, 힘겨운 겨울을 지나온 꽃들이 토닥토닥 전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055쪽,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경탄한다는 건 깨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나로서 그 순간에 존재할 때 다가오는 것들을 온전히 만나게 된다. 매번 피는 꽃이지만 매번 새롭게 만나는 꽃이 된다. 그러니 꽃을 보며 오늘도 콩닥콩닥 설레는 나는 꽤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도 꽃 앞에 선 나는 꽃에 대해서는 진실하다는 보증서를 들고 선 셈이다. 그 순간 꽃이 내게로 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할 때 꽃은 하루를 살아가는 양식이 돼 준다. 어느 날은 바람이, 어느 날은 슬픔이, 어느 날은 그리움이 하루를 살게 하는 것처럼 또 어느 날은 꽃들이 지상의 양식, 지상의 길동무, 지상의 스승이 된다.
―084쪽, 지상의 양식
너도바람꽃을 만나면 정말 못난 나보다 백 배는 더 멋진 꽃 앞에서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꽃이 온 길은 ‘꽃길’이 아니다. 꽃들은 어둠과 비바람 눈보라와 추위와 길고 긴 기다림으로부터 온다. 그 길 끝에서 우리 앞에 ‘꽃’으로 핀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못난이 너도바람꽃을 만나고 진짜로 못난 내 모습을 또 바라본다. 어둠과 길고 긴 기다림과 매일 만나는 눈보라 앞에 나는 너도바람꽃만큼 살았던가. 나라면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099-100쪽, 내 사랑 못난이, 너도바람꽃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조건 속에서도 꽃들이 예쁘게 피어나는 걸 보면 꽃처럼 생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처한 모든 것,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생이 구원의 여정이 되면 좋겠다. 구원은 결핍을 채워 완전해지는 일이다. 질병도 결핍이고 악한 마음도 결핍이다. 가난도 결핍이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도 결핍이다. 결핍의 충족, 결핍의 치유. 넘치는 걸 탐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구원에 이르는 길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116쪽, 무게를 배운다, 한계령풀
‘먼 것에 대한, 먼 곳에 대한 갈망’이란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어디가 어디인지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회귀본능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닐까. 그래서 물을수록 그리움이 깊어지는 것일까.
―189쪽, 너 돌아갈 곳 어디니? 엉겅퀴에게
숲은 가만가만 알려준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빛을 발하며 피었던 어제가 지나고 이젠 소멸을 앞둔 것들과 여전히 아직 피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들. 그 안에서 평온해지는 건 그게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순리. 흐르는 대로. 받아들임. 받아들이며 의미를 찾아보는 일.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210쪽, 그 숲의 보석상자, 금꿩의다리
그날의 위안처럼 이 꽃이 전해주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가 돌아갈 곳도 희망의 공간, 희망의 시간이라는 위안일까? 그 옛날 스스로 삶을 나락에 빠뜨렸던 아담과 이브에게 천사들이 전해준 그 아득한 위로처럼, 우리에게도 이 꽃은 여전히 희망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241쪽, 겨울 지나며 다시 찾아온 희망의 말, 스노드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