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52살 아버지(태종)가 22살 아들(이도)에게 왕의 권력을 넘겼다. 그 아들이 나다.
이날은 이 땅에서 웃으며 왕권을 넘겨주고 넘겨받은 첫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_13쪽
오늘 취임사에 “시인발정(施仁發政)” 네 글자를 도드라지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제도를 만들고 정치를 하겠다”라고, 내 의지를 세상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_14쪽
혼자서도 어디든 잘 다니던 아버지(태종)였는데, 최근에는 나 없이는 낙천정이든 어디든 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볕이 좋은 날이면 아버지와 동대문 밖으로 나가서 매사냥도 한다.
가끔은 한강에 배를 띄우고 술자리를 갖기도 하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낙천정에서 가까운 저자도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씨름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_23쪽
1419년 9월 26일, 큰아버지(정종)가 하늘로 돌아갔다. 지난 1월 초에 아버지와 내가 큰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술을 대접했었다.
그날 밤 아버지와 내가 큰아버지를 양 옆에서 부축하고 궁궐을 걸었는데,
큰아버지가 걷다가 멈춰서 “젊은 두 왕이 뒷방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허울뿐인 늙은 왕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이런 일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라며 춤을 추기도 했었다._25쪽
중국 황제의 요구는 1만 마리나 되는 말을 중국 요동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10월 2일, 먼저 얼룩말 300마리를 중국에 보냈고, 말 값 지불을 보장받는 외교문서를 받아왔다.
11월 28일까지 총 18번으로 나눠서 말을 보냈다. 부족한 말 241마리는 다음 해 1월 4일에 보충해서 1만 마리를 모두 채웠다. 이렇게 중국과의 첫 외교를 무사히 마무리했다._ 44쪽
경연을 재개한다고 하니 변계량이 신이 났다. 내가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강목』을 공부하자고 하는데도, 변계량은 유학 책인 사서를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_ 45쪽
재작년에는 홍수로 작년에는 가뭄으로 두 해 연속 농사를 망쳤다. 그 결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엉망이 됐다. 배급으로 어른에게는 쌀 4홉, 콩 3홉, 장 1홉을 준다.
11세부터 15세까지는 쌀 2홉, 콩 2홉, 장 반 홉을 준다. 그리고 10세부터 5세까지는 쌀 2홉, 장 반 홉을 준다. _56쪽
올해는 왕이 국가고시(과거시험) 시험을 직접 주관했다. 경복궁 근정전에 나가서 문과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경회루로 자리를 옮겨서 무과시험을 참관했다.
문과시험은 거듭된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과 버려진 시체, 그리고 국방과 같은 현안 이슈에 대한 수험생의 생각을 풀어내라는 문제를 출제했다._59쪽
하루는 인사행정부장관(이조판서) 허조가 노비신분을 결정하는 법을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 지금 당장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허조를 비롯한 다수의 신하가 여종을 첩으로 들여서 아이를 낳고, 재산(노비)을 늘리려는 것이다. 종부법은 태종이 오랜 고민 끝에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만들고 유지해왔다.
지금의 종부법이 유지돼야, 어머니가 노비인 장영실과 같은 사람이 재주를 펼치며 즐겁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_74쪽
작년에도 사고를 쳐서 청주의 비좁은 초가집에 가둬둔 큰형을 이천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역시나 신하의 반대가 극심했다.
신하들은 기회만 생기면 큰형의 잘못을 들춰내어 멀리 쫓아보내라고 성화다. 그래도 나는 몇 년째 꿋꿋하게 “나의 형일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다._77쪽
중국의 사신 창성이 신하 앞에서 “조선의 왕은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는가”라고 지껄이며, 왕인 나조차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신을 접대하는 부서(영접도감) 직원을 매질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한 창성은 선물을 담아가려고 나무로 만든 가방(궤)을 100여 개나 가지고 왔다.
황제가 조선에 보낸 선물을 담은 궤가 6개뿐이었으니, 100개가 넘는 가방은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 보니 윤 가방을 옮기는 국민의 행렬이 남대문 부근의 태평관에서 서대문구 현저동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사신 세 명은 이렇게 많은 물건을 먼저 보내고 5일 더 머물다가 1429년 7월 21일 서울을 떠났다._129쪽
1436년 8월 25일, 함경도 회령에 여진족 홀라온과 우디캐 무리가 침입해서 농민을 납치해갔다.
다행히 이징옥 장군과 회령에 살고 있는 여진족 오도리들이 함께 추격해서 모두 되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_224쪽
1438년 8월 26일, 경상도 경주를 다스릴 수령으로 우승범을 임명했다. 그랬더니 우승범이 궁궐로 찾아와서, 자신은 병이 있어서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른 신하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가 말없이 바라보니 한참 동안 울다가 돌아갔다.
그날 나는 “고위급 관리가 따뜻한 아랫목만 찾고 있구나”라고 괘씸히 여겼다.
런데 10월 9일 우승범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서 그냥 한참을 걸었다. 여러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_267쪽
“새 문자를 만들겠다”라는 결심은 오래전에 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계속된 여진족과의 혼란에서 장교급 군인들이 글자를 읽지 못해서 드러난 어이없는 작전 실수들을 지켜보면서,
어려운 한자를 대체할 쉬운 글자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일반 국민만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군대 조직 안에는 한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장교가 부지기수였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군대를 직접 통솔하는 중대장급 장교 중에도 있었다.
그 결과 장교 본인도 제대로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작전 수행 능력이 형편없는 오합지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_336쪽
오늘 훈민정음 사용설명서를 펼쳐보다가, 정을 써놓은 대목에 이르러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가 평소에 아랫사람을 겸손하게 대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새 문자를 만든 것에 비견되는 행동이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아내는 아랫사람을 믿는 마음(信 신)에서 정을 시작했고,
정인지는 학문을 존중하는 마음(業 업)에서 시작했고, 나는 지배당하는 소민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마음(恤 휼)에서 정을 시작했다._376쪽
지난겨울부터 신하의 집을 옮겨다니며 지내다가, 2월 2일,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궁궐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고 낯설기까지 하다.
바로 일하는 방(사정전)으로 갔다. 그리고 전라도지사(감사) 이사임에게 화포는 계속 만들되, 화약(염초)을 만드는 일은 당분간 중지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_388쪽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모든 업무는 세자가 결재하니, 모든 신하는 세자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지침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는 왕권이양 문제를 매듭짓고 싶다. 신하들은 “왕권을 이양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떼로 몰려와서, 해가 질 때까지 시끄럽게 떠들다 돌아가기도 한다. _3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