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갈피마다 가끔 이런 시간이 있다면,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기기묘묘한 세계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들
금이 간 마음에 달라붙는 은근한 위안
마음산책 스무 번째 짧은 소설, 이유리 『웨하스 소년』 출간
경쾌한 호흡, 긴 여운으로 당대 개성 넘치는 한국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마음산책 짧은 소설이 스무 권째 출간을 맞이했다. 2009년 박완서 작가의 『세 가지 소원』으로 첫 선을 보인 지 15년 만이다. 스무 번째 짧은 소설은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될 당시 “능청스러우면서도 낯선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라는 평을 받으며 흔들림 없는 자기 구역을 확보해온 이유리 작가의 『웨하스 소년』이다.
열네 편의 짧은 소설에서는 초자연적 사건들이 예사로운 일상 속에서 작가 특유의 명랑한 문장으로 천연덕스럽게 펼쳐진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구입해 가꾸거나(「가꾸는 이의 즐거움」), 아이가 날개를 달고 태어나거나(「웨하스 소년」), 보석으로 이루어진 모기가 피와 함께 즐거웠던 기억을 빨아 가거나(「보석 모기」), 목성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거나(「삼두 고양이」), 추억으로 뜨개실을 뽑아내는(「시간 뜨개질」)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시종일관 통통거리며 가뿐히 달려 나가는 작품 사이사이 삶과 죽음, 관계,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사회적 현안에 대한 주제의식 또한 꼿꼿하다. 이유리가 꾸려놓은 열네 개의 세계를 하나씩 통과하다 보면, 케케묵은 고민들은 잠시 휘발되고 아득했던 일상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왠지 앞으로도 이렇게 평생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 보고, 손을 잡고, 함께 건너가는 이야기
『웨하스 소년』에서 이유리는 ‘나’와 ‘너’라는 존재, 그리고 관계에 대해 진득하게 들여다본다. 표제작 「웨하스 소년」의 ‘나’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개를 달고 태어나 아역배우로 반짝 인기를 누리며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끌려다니듯 살아간다. 그러다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난생처음 날개와 자신의 앞날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며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는데, 웨하스 소년의 짧은 전기를 읽고 난 독자는 성패에 상관없이 그가 내디딘 첫발에 덮어놓고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나’를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작품들도 흥미롭다. 결혼하지 않은 ‘나’가 결혼한 ‘나’를 찾아와 면박을 주고(「다른 이야기」), 이쪽 세계에서 잘된 인사들이 저쪽 세계의 자신을 염탐하러 떠나는(「한편, 다른 우주에서는」)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나 혹은 분리된 자아를 마주 봄으로써 이곳의 나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성찰하고, 삶을 보다 긍정하도록 고무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오래된 지구 속담이 있다. 여기 앉아 있으면서 확실히 깨달은 사실이기도 하다. 저토록 돈이 많은 사람들도 그런데, 나처럼 후회투성이 삶을 살아온 놈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나는 정말로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까지 내가 택했던 것들이 우연하게도 가장 좋은 선택지였음을, 그러므로 모든 다중우주에서 가장 행복하고 잘된 놈은 바로 여기 있는 나라고 믿고 사는 편을 택하겠다.
_「한편, 다른 우주에서는」 중에서, 137쪽
하루 중 5분 정도만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대재앙 속에 살아가는 연인(「5분 동안」), 목성에 휴가를 갔다 미개발 지역의 늪에서 생사가 갈라진 연인(「삼두 고양이」), 온몸이 따개비로 변해가는 상대방을 단단히 끌어안는 연인(「따개비」)까지 이 책에는 다양한 국면에 놓인 연인들도 등장한다. 작가는 두 명의 타인이 발맞춰 걷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물러설 수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손을 놓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끝까지 상대를 품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려준다.
“나도 같이 있을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연희를 팔다리로 단단히 감아 끌어안았다. 혹시 나중에 누군가가 하나의 따개비 덩어리가 된 우리를 발견하더라도 떼어놓을 수 없도록. 우리는 부서질지언정 분리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_「따개비」 중에서, 184쪽
“씨익 웃던 나래의 얼굴을 떠올리던 때
그래, 나는 조금 행복했었던 것 같다.”
텁텁한 현실에서 기어코 찾아내고야 마는 행복
기쁨과 비애, 상큼함과 아릿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직설적으로 행복을 희구하는 작품들이다. 「투데이즈무드」에 나오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비싼 구독료와 엄격한 룰에도 불구하고 ‘기분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며 나날의 행복을 상자에 위임한다. 「돌이키는 하루」의 ‘나’는 목뒤의 버튼을 눌러 평생 한 번만 저장할 수 있는 하루를 평범한 중학교의 어느 날로 선택하고,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도 그날을 재생하는 즐거움에 매일같이 빠져든다. 한편 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기쁨 목걸이」의 ‘나’는 친구 ‘나래’에게 일과 중 도파민 수치가 높았던 순간을 캡처해 재생해주는 목걸이를 선물받는다. 하루를 마치고 기대 없이 목걸이를 작동하자 ‘나’의 머릿속에는 아침에 새로 산 보디로션을 처음 발랐을 때, 출근길에 흐드러진 능소화를 바라보았을 때, 점심시간에 돈가스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가 재생되고, ‘나’는 일상 곳곳에 의식하지 못한 기쁨의 순간들이 자리했었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팍팍한 삶의 굴레에서도 끝끝내 재미를 발견하기를, 행복을 희망하기를 놓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야기를 궁굴리며 지어 올린 환상의 세계는 낯섦 대신 익숙함으로 우리 삶과 포개어진다. 짧은 이야기 안에서도 다채로운 서사를 통해 폭넓은 소설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이유리의 『웨하스 소년』은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재미와 기꺼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인생이 다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거 아닌가. 행복했다 불행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행복이 불행보다는 좀 더 많은 그런 구성으로.
_「투데이즈무드」 중에서, 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