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영문학계의 주요 시인들을 선별하고, 시를 선별하여 모아 낸 ‘소명영미시인선’ 시리즈이다. 『나는 무명인! 당신은 누구세요?』는 그 첫 번째 책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문학적으로 연결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선집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12월 10일 매사추세츠주의 애머스트에서 태어났다. 디킨슨은 200년 전에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자수성가한 가문의 후손으로, 3남매 중 둘째였다. 디킨슨에게 시인들을 소개해주고 직접 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으로 흔히 벤저민 뉴턴이 거론된다. 2년간 디킨슨의 아버지에게 법률을 공부한 법학도로서, 그녀에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접하게 해주고 미국 초월주의운동의 대부 랠프 월도 에머슨의 첫 시집을 선물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벤저민이 결핵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두 사람의 인연은 금시에 끝나버리고 만다.
1850년대 중반, 갖가지 만성질환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결국 몸져눕게 되었고, 디킨슨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1882년에 돌아가신 것을 감안하면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디킨슨은 1858년 여름부터 그동안 써온 시들을 재검토하여 깨끗하게 필사하고 그것들을 원고 형태의 책으로 묶기 시작한다. 그렇게 1858년부터 1865년까지 엮은 원고 시집이 40권이나 되었고 시의 편수로는 거의 800편에 달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생전에 이 시집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뻔한 1,800여 편의 시
에밀리 디킨슨의 여동생 라비니아는 언니가 죽은 뒤, 편지들과 함게 깔끔하게 필사해서 엮어 놓은 40여 권의 원고 시집과 철하지 않은 상태의 시 원고들을 발견하였다. 그중에서 언니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고인의 유언대로 대부분 불태웠다. 그때 그녀가 시의 원고들까지 몽땅 불태워 버렸다면 에밀리 디킨슨은 후세에 무명 작가로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라비니아는 언니의 시를 보자마자 그 진가를 알아보고 곧장 출간을 서둘렀다. 그렇게 해서 1890년 11월에 디킨슨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고, 1891년에 두 번째 『시집』, 1896년에 세 번째 『시집』이 연달아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은 2년 동안 11쇄가 나왔고 두 번째 시리즈도 2년 만에 5쇄를 내며 대단히 성공했다. 이 시집들의 편집자는 에밀리 디킨슨의 문학적 스승이었던 히긴슨과 그녀의 오빠 윌리엄의 연인 메이벌 토드였다. 1955년에는 토머스 존슨이 디킨슨의 원고를 그대로 살려 세 권으로 엮은 전집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고, 3년 후에 씨어도라 워드와 함께 디킨슨의 편지들도 출간하기에 이른다.
하얀 무명천을 걷고, 그 뒤의 예술가를 찾아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초기 비평은 마치 소복 같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그녀의 기괴한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야말로 그녀의 숨겨진 삶을 들춰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혁신적인 여성 시인으로서, 19세기 낭만주의시대를 넘어 미국 현대시의 원조로까지 통하고 있다. 유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월트 휘트먼, 월리스 스티븐스, 로버트 프로스트, T. S. 엘리엇 등과 함께, 에밀리 디킨슨을 주요 미국 시인으로 꼽았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삶, 사랑, 자연과 죽음과 같은 주제로 분류된다. 그녀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아주 강렬하다. 주제마다 번득이는 재치와 진솔한 열정, 예리한 통찰이 돋보인다. 그것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철저한 예술가 에밀리 디킨슨의 변별적 특질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