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일:
정신의 일대기로서 독서사史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꽤 있다.”(9) 여든넷의 비비언 고닉이 청년기부터 평생 읽고 또 읽은 책들과 맺어온 관계를 몸소 분석한 『끝나지 않은 일』은 정신분석가의 방이라는 내밀한 공간 배경을 연상시키며 시작된다. 고닉이 처음부터 이 책의 주제인 ‘다시 읽기’를 내면세계의 심층 탐구에 비유한 것은 자연스런 출발이나 작위적인 구도라기보다, 오히려 필연적인 연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Notes of a Chronic Re-reader’라는 원본의 부제가 보여주듯, 끝없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그에게 다시 읽기는 멈출 수 없는 일business인 까닭이다.
최대한 통합된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내 평생의 과업이 되었다. (…) 또다시, 나는 다르게 읽게 되었다.(25)
활자로 인쇄된 이상, 책이라는 물질 내부의 인간들은 영원히 같은 조건에 붙박여 변하지 않는 선택을 내리고 살던 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어떤 독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텍스트의 불변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가 자기 정신의 가변성을 확인할 축이 된다. 다시 읽는 독자는 같은 텍스트로도 매번 다른 독서를 경험하며 자기 변화를 체감한다. 그림 동화를 넘겨보던 어린아이, 『작은 아씨들』을 손에 들었던 소녀는 그 무렵 자기 혼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세계와 조우하며 몇 권의 중요한 책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어간다. 콜레트를 향한 열광을 접고 뒤라스에게 자기를 비춰보는 독자가 되어가는 동안 그는 무수한 사실을 새로 발견하고, 수많은 인물과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여기서 다시 읽기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안다고 생각했던 텍스트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자아와 세계를 재구성하기, 그것은 지난날을 다시 살아내기라도 하듯 새삼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다. 써놓은 글이 자기 자신이듯, 읽어낸 글도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비비언 고닉은 쓰기에 관한 책인 『상황과 이야기』에서 회고록의 핵심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 (…) 진짜 우리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 일반적인 재앙이나 무작위적인 정치적 불행으로는 설명하거나 조명할 수 없는 나.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되어가는’ 인간, 우리 시대의 말로 하자면 참다운 나.”(108~109) 그는 맺음말에서 이 취지를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 “처음부터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곧 작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어떤 글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은, 글을 읽는 시점에 필요한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184, 188) 자기에 대한 집중, 명료한 자아인식이라는 작가적 소양은 읽기와 다시 읽기에 관한 책 『끝나지 않은 일』의 독자에게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 읽기는 ‘일인칭personal’과 ‘페르소나’로 특징 지어지는 그의 회고록 문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칭을 설정하고 페르소나를 내세우기 위해 응당 ‘누가 말하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더 잘 알기 위해, 제약투성이인 조건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알기 위해”(60) 읽는 것도 그만큼이나 당연하다.
처음 읽었을 땐, 독서하는 그 순간의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에 눈을 떴고, 나중엔 내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사유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타인으로 느껴질 만큼 오래 살고 나서—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다른 누구보다 더 놀란 것도 나였다.(150~151)
의식의 진화,
내가 됨으로써 나를 벗어나기
하지만 그토록 알고자 했던 ‘나’가 누구이길래, 80년을 들여다봐도 새삼 놀랍다는 걸까? 인생 초년, 『빌리지 보이스』에 무턱대고 글 한 편을 보낸 작가 지망생 고닉은 “그런데, 대체 누구십니까?”라는 편집장 댄 울프의 질문에 “잘 모르겠네요. 제가 누굴까요”라는 당황스러운 답을 내놓는다. 이 당혹감은 마흔이 넘어서도 여든이 넘어서도, “나 자신에게 나를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하던 혁명적 순간에도 문득문득 그 앎의 일시성에 의혹을 제기한다. 그것은 자기의 실체를 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입증해보라는 듯이 “자아분열에 매몰된 나머지 자처해버리고 만 편협한 경험의 궁지”,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상기시키며 그를 끝없이 몰아세우고, 매 순간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절감케 한다.
내 인격에 내재한 모순이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동안 신경도 안 썼던 행동 패턴들이 갑자기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엄습해왔다. 나는 내가 일반적으로 ‘훌륭한 인격’이라 불리는 가치를 대단히 중시하는 평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내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 남의 말허리를 자르며 호전적으로 따지고 들었고, 가족 모임은 따분하고 하찮은 일로 여겼으며, 작업실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며 시들어가면서도(적어도 생각으론 그랬다) 인간관계는 오히려 하나씩 끊어내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을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나 자신의 욕구라고 판단했던 바에만 충실하느라 친구나 연인의 욕구는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자아분열에 매몰된 나머지 자처해버리고 만 편협한 경험의 궁지란. 이젠 얼마나 소름 끼치게 느껴지던지!(24-25)
『끝나지 않은 일』의 다시 읽기가 단지 불안한 영혼의 자기 재회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통합된 자아, 더 완전한 자기’에 다가서겠다는 열망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불완전한 자기로부터 해방시키며 과거의 타자성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나, 이질적인 나를 소름 끼치는 깊이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인칭)는 자기(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있음도 안다. 그것은 읽기를 통해 탄생되는 생애의 페르소나다. 저자가 ‘진실’이라고 일컫는 내면적 현실성inner reality은 완전한 자아, 최선의 자아보다는 이 불완전한 페르소나, 일인칭 서술자를 통해 더 생생하게 조명된다. “이제는 허구한 날 나 자신을 붙잡고 씨름해야 했다. 나의 한 부분이 또 다른 부분과 맞서 싸웠고, 이성이 이런저런 행동을 떨쳐버리라고 하면 강박이 이성의 소리 따윈 듣지도 말라고 주문했다. 그악스런 열패감에 시달리며 나는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25) 그래서 그는 불완전한 자아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그들로부터 완전한 자아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끝나지 않은 일』에 인용된 작품들에는 얼마간의 편파성이 반영되어 있다. 고닉은 『상황과 이야기』에서도 이 편파성을 인정한 바 있다. “내가 쓴 글을 훑어보면 심각한 편파성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내가 읽은 책들과 읽은 방식에도 그런 편파성이 반영되어 있다. 내가 열광 중인 회고록이나 에세이를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무시하고 있는 다른 종류의 에세이와 회고록, 그리고 내가 읽고 있는 책이 간과하고 있는 점들을 일일이 지적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래 맞아, 하고 곧장 수긍했다. (…) 내 관심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189)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한계가 바로 고닉의 정전―그가 평생에 걸쳐 다시 읽는다는 텍스트들의 핵심이자 정수라는 점이다.
자아분열이 유발하는 두려움과 무지, 그로부터 올라오는 수치심, 수의처럼 우리를 뒤덮어 말려 죽이는 그 미스터리는 항상, 언제나 문학의 관건이었다. 그리고 또한 좋은 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힘, 글에 암묵적으로 내재하는 그 힘의 원천을 알게 되었다. 그 힘은 산문의 신경 어딘가에 붙들려 담겨 있다. 그것은 어김없이(흡사 원초적 무의식에서 나오듯) 우리를 끈질기게 사로잡는 어떤 상상이었다. 균열이 아물고 부분들이 합체되고 연결에의 갈증이 기가 막히게 해갈되어 잘 작동하게 된 인간 존재의 상상이었다. 과거에도 또 지금도, 내 생각은 같다.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이 아니라, 그 위업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다.(26)
자기분열을 의식하며 통합된 자아에 다가서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이 열정적인 독자는 분열된 인간들에게 끌리며 그들의 통합된 실존을 상상하는 데서 텍스트의 힘을 실감한다. 유대인, 여성, 빈민가 출신, 노동자계급, 뉴요커…… 고닉이 날 때부터 처한 삶의 조건들은 실존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그의 원초적인 감각들을 고정시켰다. 자기의 전부 혹은 일부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 진실하게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관계에서조차 착취당하고 배척당한다는 느낌, 노골적이게든 교묘하게든 비가시화된 구체적인 불행들이 이 독서의 재료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13) 독자로서 고닉은 그 압력을 느끼는 데서부터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세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고, 아직 외현하지 못한 “실종된 내면의 삶”을 발굴하려는 것 같다.
궁극의 다시 읽기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번역-해석을 통해 『끝나지 않은 일』을 ‘다시 쓰기’ 한 역자는 포기를 모르는 이 통합의 시도를 “감동적인 성장서사”라고 말한다. 빛나는 통찰로 ‘끝나지 않은 일’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섬세한 필치로 그 의의를 증언한 「옮긴이의 말」은 과연 독자의 지평이 작품의 지평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삶의 압력”을 느끼려는 미숙한 의식(들)의 야심과 실패를 고닉은 정직하게 바라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핵심 텍스트로의 거듭되는 귀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쓰고 우리 의식을 새로 발명한다.
따라서 정말로 감동적인 것은, 80대의 읽기가 20대의 읽기를 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순간에는 그저 결함 많고 흔들리는 불완전한 의식으로만 발굴할 수 있었던 의미들도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는다. (…)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새로운 앎을 끝없이 발견해내는 지혜의 거름이 된다면, 고통과 무지와 갈망으로 흘러간 삶의 시간도 어느 한 순간 무의미로 떨어질 수 없다.(2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