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문어, 동그란 0에서 시작하는 숫자의 세상
정면을 응시하는 동그란 눈동자. 동그란 머리에 점점이 찍힌 동그란 반점. 동그란 숫자 ‘0’ 안에 유연하게 몸을 구부려 누인 문어. 동그란 형상의 연속에 방점이라도 찍듯, 문어가 지닌 뼈도 마침 0개라고 한다. 새빨간 문어는 0이라는 출발선을 넘어 북극고래 꽁무니, 각양각색의 해면들 사이, 외뿔고래 옆에 틈틈이 얼굴을 내밀며 우리를 숫자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은 우리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눈 뭉치 하나를 만들려면 눈 결정이 몇 개나 필요할까? 아이들이 품는 궁금증 가운데는 숫자에 얽힌 것이 매우 많다. 《문어 뼈는 0개》는 이 같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에 숫자로 대답해 주는 책이다.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에 시선도 마음도 빼앗겨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인간·자연·우주 등 폭넓은 분야에 관해 알아 가며 수학적 지식도 함께 쌓을 수 있다.
어려운 수학 개념을 귀엽고 친근하게
이 책이 숫자를 세는 방식은 독특하다. 먼저 실체가 확실한 1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0부터 세기 시작한다. 그 뒤로도 1, 2, 3처럼 1만큼 커지지 않고 10, 200, 3000으로 껑충 뛴다. 1에는 0을 한 개 붙여서 숨소리가 10데시벨이고, 2에는 0을 두 개 붙여서 사람 몸에 200종류의 세포가 있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0이 점점 빽빽하게 줄지은 끝에는 9에 0이 아홉 개 붙은 90억까지 다다른다. 1부터 9까지, 많게는 100까지 세는 것이 일반적인 여느 숫자 책과 달리, 0부터 90억까지 이르는 방대한 범위는 생각의 지평도 확장시켜 준다. 0이나 거듭제곱은 자칫하면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가까운 일상 또는 넓은 세상에서 연관된 사례를 가져와 친근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보카도 씨 한 개’, ‘수심 4,000미터’, ‘잎사귀 50만 장’처럼 단위가 다른 여러 대상을 세며 단위 명사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안드레아 안티노리의 그림 또한 우리와 숫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한몫한다. 그는 아주 작은 동물이나 벌레는 물론 구름, 물방울 같은 무생물에도 얼굴을 그려 넣어 인격을 부여했다. 덤덤하기도, 웃기도, 찡그리기도 하는 이들의 표정에서 상황과 내용을 유추하며 읽을 수 있다. 한편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그림들도 책장 사이사이에 유머를 더한다. 우주에서 테니스를 치는 외계인들, 참나무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새, 인파에 뒤섞인 원숭이나 고양이 또는 정체 모를 생물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같이 흩어져 있어, 이러한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0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
《문어 뼈는 0개》는 아무것도 아닌 수에서 시작하여 90억, 나아가 그 너머까지 바라본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사고력도 이와 같다. 글쓴이 앤 리처드슨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어른이 함부로 허락하거나 축하할 수 없듯, 아이들에게 일부러 영감을 줄 필요 또한 없다고 말한다. 자연수와 거듭제곱을 결합한 숫자 세기, 세상에 관한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과의 접목, 글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은 그림 등, 이 책은 아이들의 흥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고 아이들이 책 바깥의 세상까지 눈을 돌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앤 리처드슨이 위 이야기와 함께 소개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첫째 아이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씨앗 꼬투리를 보여 주었는데, 그동안 자기는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그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가 내밀었던 씨앗 꼬투리처럼 《문어 뼈는 0개》 또한 어른이 봐도 놀랍고 새로운 세상을 가득 담았다. 아이들에게는 그동안 궁금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거나 아직 알지 못했던 세상에 빠져들게 한다면, 어른들에게는 알고도 무심코 지나쳤거나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