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 ‘사건’은 먼저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하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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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 된다.
--- p.29
폭력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사건이 지닌 폭력성의 핵심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 p.34~35
무의식의 욕망에 의해 부인된 사람들, 리얼하게 완결된 서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야말로 ‘타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듀」의 경우 그와 같은 타자는 젠더로서의 여성이다.
--- p.50
‘사건’을 받아들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과제로 부여된 바로 그때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 언설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노골적으로 이야기되면서 ‘사건’의 폭력 속에서 살아온 이 여성들에게 다시 한번 폭력을 휘두른다. 우리는 그 폭력을 고발하고 규탄할 책임이 있다.
--- p.58
사건을 완결된 서사로 리얼하게 재현하고 싶어하는 스필버그의 욕망은 타자가 당한 폭력을 부인하고 망각하는 것이며 그의 내셔널한 경험, 내셔널한 욕망과 분리하기 어렵게 연관되어 있다.
--- p.80
하지만 그 전쟁에서 부조리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 전쟁이라는 ‘사건’의 폭력을 현재의 서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를 상기하게 하는 기회를 없애고 자신의 피해만을 기억하고 상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원더풀 라이프〉와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 사회의 내셔널한 경험 그 자체를 반복하고 있으며 타자의 부인이라는 내셔널리즘적인 욕망, 그리고 내셔널리즘 자체를 나누어 갖고 있다.
--- p.108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존재는 타자의 기억 저편, ‘세계’의 외부로 밀려나 역사에서 잊힌다.
--- p.111
결코 매듭지을 수 없는 어긋남, ‘사건’의 폭력이 남긴 흔적을 상처로서 현재의 이야기에 기록하는 것, 거기에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p.131
인간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인간을 영유하는 그런 ‘사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건’의 기억을 ‘서사’로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영유하는 것은 바로 이 난민적 삶을 사는 사람들뿐이다.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난민’에게 생성하는 것, 즉 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 속에 있다.---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