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지 못한 책이 안전한 사회를 만든다
나쁜 책이 있다. 읽는 순간 위험해질 수 있어 독자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출판사를 협박하거나 혹은 인쇄된 책을 회수해 폐기한다. 주로 정치권력이나 종교계 권위자들이 나서서 한 일이다. 평범한 어떤 시민들도(그들은 권력자가 아니지만), 역시나 나쁜 책을 묵과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읽는 순간 나와 내 가족이 살인 등의 사건, 부도덕 등의 가치 혼란에 물들거나, 내 아이의 정체성이 바뀌거나, 혹은 이교도들이 내가 사는 곳을 점거할 것 같아서다. 나쁜 책을 두려워한 모든 이는 ‘안전한’ 사회를 원했다.
하지만 문학은 그 자체의 에너지보존 법칙이 있는 듯하다. 어떤 문학들은 뒷걸음질하는 법 없이 불에 덴 듯한 뜨거운 문장으로 파고들거나 혹은 카프카처럼 차가운 문체로 불길에 맞섰다. 작가들은 각자 다른 나라와 시대에 속해 다른 작품을 썼지만, 하나의 관점을 공유했다. ‘안전하지 못한 책이 안전한 사회를 만든다’는 역설이다.
김유태의 『나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된 후 널리 알려진 책 30권을 골라 여행을 떠난다. 여행(혹은 탐험)이라고 한 이유는 30권 모두 독자를 우선 작가의 모국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 책은 그곳에서 찢기거나 방화되거나 국경 밖으로 내쳐졌기에 그 내력을 찾아 독자는 작품이 발표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부분이 픽션인 이 순수문학 작품들은 허구의 산물로 대우받지 못하고 현실 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워졌다. 상상은 늘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왔다. 둘째, 이 작품들은 겉으로는 사회를 위반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한 시대를 추동하는 정신이 심어져 있다. 그것들은 몇 겹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저자는 중첩된 구조 속으로 독자와 동행하며 상징과 알레고리 등을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감각적으로 들려준다. 그 안에서 문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예술 그 자체임을 입증하는데, 문장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우리 생을 충분히 떠받칠 만한 상판裳板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금서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와 동의어다. 금서를 둘러싼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초월적인 문장의 합으로 안전하게 만들려는 작가. 둘째, 작가에 대한 질투와 조바심으로 독서를 금지하려는 자. 셋째, 곤경에 처한 책들을 읽는 독자. 이 중 가장 중요한 부류는 금서의 독자다. 그들은 망각 속에 있는 책들을 눈부시게 되살려낸다. 가장 치열하게 사고하는 독자들이 체계 바깥으로 자취를 감췄던 책들을 현실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독자가 책의 불온함을 제거해준다.”
이 책에서는 한국문학도 두 편 다뤘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와 마광수의 『운명』이다. 이문열의 책은 1980년부터 7년간 금서였지만 지금은 읽을 수 있다. 마광수의 책은 대법원의 음란물 판결에 아직도 묶여 있어 독자는 시중에서 이 책을 구해 볼 수 없고 유족 역시 재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 28권은 해외 작가들 작품인데, 모두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해당 국가에서는 여전히 금서 조치를 풀지 않고 있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표 격인 미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자국의 제국주의 만행을 계속 감추다가 이제는 없었던 일로 하려는 일본도 포함돼 있다.
이 책에서 저자 김유태는 생존해 있는 금서의 작가들을 가능한 한 인터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켄 리우, 옌롄커, 비엣 타인 응우옌, 팡팡, 이문열 작가의 육성이 이 책에 담겼다.
여기 실린 금서들 중 상당수는 작가가 젊을 때 쓴 것이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서른 살에 집필했고, 넬리 아르캉은 『창녀』를 20대에 썼다. 힌두교인 학살을 다룬 『라자』 역시 타슬리마 나스린이 서른 즈음에 썼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로 금서 작가가 된 켄 리우 역시 젊다. 텍스트 속에서 현실의 자유를 실현하는 일에 젊은 예술가들이 좀더 대범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금기의 선을 한번 넘은 이들은 후진하는 법 없이 점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나스린은 금서를 펴낸 이후 30년째 해외 망명 중이며, 작가, 의사, 인문주의자, 페미니스트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금서가 역사를 추동케 하는 힘은 굳세다. 따라서 거기에 깃든 작가의 비극을 언급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여기 소개된 몇몇 작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리스 장은 서른여섯에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겼는데, 난징 비극의 잔상들이 그녀에게 점점 짙게 배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캉, 헤다야트, 마광수도 문장으로 사회에 맞서다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저자는 “죽음을 좀더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제목 ‘나쁜 책’은 반어적 의미로 읽혀야 할 것이다.
저자는 금서 작가들의 문장과 문체에도 주목했다. 여기 소개된 이들의 다수가 노벨문학상, 부커상, 전미도서상 등을 수상한 작가여서 그들의 문학적 위상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자 역시 시인으로서 다루는 대상에 걸맞게 어둡고 나쁜 책들에 최대한 밝은 빛을 겹치면서 자신의 문장을 가다듬었다. 책을 다루는 책의 작가로서 서른 명 작가의 문장을 제 문장 속에 녹여넣고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독자들은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날것처럼 세상을 투영하고
선의로 가득한 책들을 구출하다
금서의 역사는 곧 그 사회의 현실과 연결된다. 우선, 전 세계에서 아시아인들만 못 읽는 책들을 1부에서 다뤘다. 첫 번째 글부터 강렬하다. 8만 명에 대한 성폭행을 고발하는 책을 다루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이 저지른 중일전쟁 때의 범죄를 조명한 『난징의 강간』을 일본 국민이 읽지 못하도록 오늘날까지 금지하고 있다. 현재 SF 작가 중 가장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켄 리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역시 일본에서는 읽지 못한다. 악명 높은 731부대 이야기를 다뤄 일본 출판사는 이 작품만 빼고 켄 리우의 책을 출간했다. 옌롄커는 여덟 권이 중국 당국에 의해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서를 낸 작가로 꼽힌다. 저자는 옌롄커를 세 번 인터뷰해 책에 실었는데, 그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2부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책들이다. 이 책들은 표면적으로는 폭력성 때문에 금지됐다. 책이 폭력의 민낯을 포장지 없이 비추면 사회는 이를 금지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은폐된 민낯 속에서 선의와 통찰을 캐낸다. ‘나쁜 책’은 끊임없이 ‘안전한 사회’에 균열을 낸다. 균열을 내는 가장 전략적인 방법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무섭고 끔찍한 것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끔찍하고 무섭다. 그러니 우리 본성이, 혹은 감정적 습관이 현실을 외면하면서 세상을 자꾸 고정된 이미지로 가둬두고 더는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면이 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살인을 ‘사유’하기 때문에 이 책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머니를 살해한 이 스페인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그 원망스러운 어머니로 상징되는 국가를 고찰하게 된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웠던 여주인공이 습격으로 얼굴의 반쪽을 잃으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인비저블 몬스터』는 총격 테러, 방화와 폭발, 납치와 살인 등의 소재 때문에 모든 출판사가 출간을 거절했지만, 세밀히 읽어보면 이 책의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유한다는 데 있다.
3부는 생각의 도살자들에 맞선 작품들을 다룬다. 즉 체제와 불화한 작품들이다. 쿤데라의 책은 농담이 허락되지 않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농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보후밀 흐라발의 책은 폐지를 쓸어 담는 노인 한탸의 이야기가 현 정권을 겨냥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하지만 정권이 책을 폐기하더라도 사상의 자유는 폐기되지 않은 채 두 작가는 세계적으로 독자들을 확보해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몇몇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독서가 금지됐다. 왜 많은 작가는 포르노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는 작품들을 써낼까? “창조의 동력은 에로스이고, 에로스의 창조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4부는 섹스에 조심하는 삶이 어떤 왜곡된 사회상을 낳고, 또 인간을 억압하며 결국 비극까지 불러오는지 다섯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독자는 적나라한 성적 묘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령 『포트노이의 불평』은 책 전체가 자위행위에 관한 내용이어서 금서가 됐다. 하지만 주인공의 자위는 개인의 병증이 아니라 사회적 병증의 한 형태로 읽는 것이 이 소설을 보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즉 변태의 탄생 이유를 첨예하게 사유한다는 점에서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은 문학적 성취를 이뤄낸다. 독자는 알 것이다, 주인공을 히스테리컬한 인물로 만들어낸 부모의 실체를. 그 유대인 부모는 한 번도 자식에게 영혼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고 도덕과 질서에 순응하게끔 숨 막히는 인생으로 이끌었다.
문학이 가장 큰 도전을 한다고 여겨진 때는 종교에 맞섰을 때다. 종교는 늘 선한 얼굴(가면)을 하고 있어 자신들의 경전과 다르게 상상하는 문학을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가톨릭 최고 권력자인 교황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혹은 정치권력의 수장이 독실한 신자라면 종교 비판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같은 작가들이 바로 신의 이름으로 내쳐졌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인간 고통의 원인을 묻고자 하는 눈물의 서書로 읽어야 한다”.
마지막 6부는 저주가 덧씌워진 걸작들을 다룬다. ‘다 읽는 순간, 자살하는 책’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픽션은 더 깊은 진실이다’ ‘두 구의 시신 옆에서 상상한 미성년자들의 교접’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정부의 집단 통계 조작’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글들은 이 작품들에 씌워진 재앙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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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쁜 책’을 이렇게 정의한다. “날것처럼 세상을 투영하고 반영하는 것이 거부된 세상에서 무형의 마지노선인 ‘윤리’를 고민하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선의로 가득한 책.” 저자는 이 선의로 가득한 책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쁜 책』을 썼다.
절망의 씨앗이 삶의 풍경을 망쳐서 그것을 작가들이 거울처럼 비추면, 그 말을 한 혀는 잘리고 그것을 쓴 손가락은 절단됐다. 이것은 나쁜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해 권력과 사회가 한 행위를 은유한 말 같지만, 실제로 살만 루슈디와 같은 이는 테러를 당해 한쪽 눈을 잃었고, 이 책에 소개된 나지브 마흐푸즈 역시 한 청년의 칼부림에 목이 찔렸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라는 작품을 보면 살인자 두아르테를 교화하려던 교도소는 실패하고(제도의 실패), 가톨릭 사제도 그의 재범을 막지 못했다(영성의 실패). 결국 폭력을 억누르지 못한 두아르테 이야기는 한 시민의 실패이자 인간의 실패라는 주제를 형성해나간다. 권력은 이런 책을 읽는 독자를 막으려고 금서로 지정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것은 권력 자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