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난 은선 언니가 갑자기 영상통화를 걸어 왔을 때도 놀랐지만, 그 통화의 목적이 소개팅 주선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 밑도 끝도 없이 나와 그 사람이 잘 맞을 거라고만 주장하는 은선 언니를 보던 나는 영상 속에서 민소매를 입고 까맣게 탄 얼굴로 웃고 있는 언니의 얼굴이 좋아 보여서, 거절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 거절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때가 아니었다.
p. 15 〈맛있는 녀석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구멍들 사이로 거무죽죽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고 앙상한 손. 눈을 비볐지만, 시체 같은 손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목격자는 나 말곤 없었다. 다른 이들은 눈을 감고, 오로지 백팔배에만 집중했다. 때때로 몸을 들썩이며 흐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곧이어 창호지를 뚫고, 그들이 정체를 드러냈다.
창백한 피부와 축 처진 어깨, 비뚤어진 입과 멍한 눈빛... 좀비였다! 입시에 실패하던 시절, 가위에 눌릴 때마다 꿈에서 보던 좀비 떼가 맞았다.
p. 69 〈러브러브 좀비템플〉
정소나기 노래를 하나도 모르는 여자랑 사귀고 싶어. 여기, 자신의 말이 불러온 말의 나비효과로 인해 곤경에 처한 PD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김난주.
난주는 합장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모니터의 출연자 목록만 응시했다. 2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도 몇 번 안 깜박였다. 차라리 이러다 시력을 잃었으면 싶었다. 부디 2000년대의 전자파가 인간을 단숨에 죽일 만큼 해로워졌길. 회의실의 윤 작가는 난주 속도 모르고 ‘점심 또 설렁탕;’이 적힌 디지털 패드를 유리창 시트지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래로 꺾은 엄지를 마구 흔들며 반항했다. 난주는 지금 자신의 복귀작인 〈터치 마이 하트〉의 작가에게 저렇게 나대고 싶었다.
p. 115 〈행운을 빌어 줘〉
병원을 나오자 모든 것이 시끄러웠다.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소리, 고층 빌딩을 짓는 공사장의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 각자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 상대가 없는데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보다 대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대낮의 도심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서우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나같이 귀에 흰색 전자 기기를 걸고 있었다. 바로 레트로 데이팅 기기 ‘팝콘’이었다.
p. 168 〈팝콘을 들으세요〉
“너네는 9개월 동안 임신을 해?” 울리오의 다음 말은 파격적이었다. “우린 21일이다.”
재혁이 입을 떡 벌렸다. ‘3주 만에 쓸 만한 고등 생명체가 만들어지긴 해?’라고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울리오가 씩 웃었다.
“그럼 괜찮은 거지?”
“어....” 재혁이 눈알을 굴렸다. “그, 그러....”
“좋았어.”
“야, 잠깐만!” 재혁이 말했다. “부작용은 없어? 외계인의 아이를 임신해도 괜찮은 거냐고.”
p. 224 〈나의 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