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개인주의의 역사를 쓴 러시아 역사학자 구레비치(Aron Gurevich)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정치와 경제만이 아니라 감정과 문화의 측면에서도 전체주의가 개인의 주도권과 개인의 창의성을 억눌렀음을 비판했다. 러시아 사회를 재앙에서 구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지적 분위기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고민 끝에 러시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라는 문제를 핵심적 쟁점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_ 26쪽
사회주의는 본래 개인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다. 마르크스는 아침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토론하는 자유로운 일상을 꿈꾸었다. 사회주의는 존엄한 개인이 생산관계에 의해 소외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계급관계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 _ 32쪽
개인주의자는 전통과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고 대세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쉽사리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사람이 무심코 따르는 관습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류의 지배적 의견을 따르지 않고 비판적 소수 의견을 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타당한 의견을 주장하면 그것을 경청하고 수용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개인주의자는 무엇보다도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생각의 주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는 없다. _ 37쪽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egoism)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자유로운 개인주의자(individualist)를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자와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는 우선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밖의 이익이 될 만한 것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자는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관계를 중시한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self-interst)’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지만, 개인주의자는 ‘진정한 자아(authentic self)’를 추구한다. 이기주의자는 세상의 쾌락과 재화를 추구하지만, 개인주의자는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자기다움을 실현하려고 한다. _ 41쪽
개인주의자는 철저하게 자기 본위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살 때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자기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만히 보지 못하
는 획일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들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의 ‘튀는’ 부분을 죽여서 자기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놓아야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된다. 한국 사회는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버티기가 힘든 사회다. _ 60쪽
개인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취약하다. 유럽의 파시즘만이 아니라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도 취약한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1919년 다이쇼 민주주의를 구가하던 일본을 방문한 존 듀이는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지 못할 경우, 일본은 관료들과 군인들이 지배하는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예견했다. 1945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 사회개
혁의 일차적 과제는 군국주의 체제를 민주적 체제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미군정하에서 일본 사회는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집단주의 에토스가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_ 76쪽
미학적 쾌락주의자는 오도된 욕망, 물신화된 상품 소유 욕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세련된 안목으로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 닳아빠진 뻔한 길이 아니라 자기만의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다. 개인주의자의 쾌락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없던 것을 발명하면서 극대화된다. 감각적 유흥이나 불필요한 과소비, 세속적 과시나 가벼운 놀이에서 즉각적으로 얻는 즐거움도 좋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기를 발견하고, 내면의 비밀정원을 가꾸고,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를 관찰하면서 그윽한 즐거움을 누린다. 미학적 쾌락주의자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내면적 삶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음의 충만함을 누린다. 그것은 갑자기 급하게 다가오는 쾌락이 아니라 서서히 차오르는 즐거움이다. _ 91쪽
이제야말로 개인주의를 동반하는 개인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다.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상호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개인들 사이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인간관계를 집단주의에 근거한 수직적 인간관계에서 개인주의에 기초한 수평적 인간관계로 바꾸어야 한다. _ 106쪽
개인주의자는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마음의 자정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소비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가져온 폐해는 상업적 웰빙이나 피상적 힐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의 내면생활을 풍요롭게 일구지 않는 한, 언제나 경쟁에 시달리고 물질에 목마르고 남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불타기 쉽다. 개인주의자는 자기 내면에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공간을 만든다. 내면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한 개인주의자는 물질주의적 가치, 황금만능주의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자기만의 평온한 삶을 산다. _ 111쪽
개인주의가 자유롭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본 교육을 마치고 성인이 되면,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벌어 쓸 수 있도록 개인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경제 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최소한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복지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생존에 매달려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발견하고 발명할 겨를이 없다. 민주주의와 복지사회가 결합되어야 개인주의가 꽃필 수 있다. _ 132쪽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여성이 작가가 되려면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과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을 때, 인습을 타파하고 인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생각을 만들 수 있다. 작가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당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려면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자기만의 방’은 외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사생활의 공간이다. 자기만의 공간은 독립성과 자율성이 숨 쉬고 자라는 공간이다. _ 139쪽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거나, 낙엽 지는 가을날 숲속을 거닐면서, 바다 위의 수평선이나 넓은 들판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나의 삶이 갖는 의미를 묻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말해준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의미를 깨닫는다. 각자 자신의 수련과 기도, 수행과 고행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다. 세속을 벗어나 피안에 있는 초월적 존재와 교류함으로써 모든 개인은 인격의 존엄성을 확인한다. _ 148쪽
많은 사람이 생물학적 욕구, 습관과 관습, 광고가 만든 트렌드에 따라 살면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산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의 욕망은 조작된 욕망일 수 있다.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일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함정과 덫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 인형극 공연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살아가면서 자기의 의도대로 산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인형을 움직이는 줄은 눈에 보이지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과 의식을 조작하는 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줄의 존재를 인식하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된 삶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어렵다. 개인주의자는 그 줄의 존재와 모습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존재다. _ 170~171쪽
많은 사람이 고독을 피해야 할 부정적 상황으로 생각하지만,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사람에게 고독은 창조를 위한 숙성의 시간이다. 무서운 건 고독이 아니라 구속이다. 구속은 자유로운 창조를 가로막지만, 고독은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고독은 소외와 다르다. 소외는 타인으로 격리되는 수동적 상태이지만,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능동적 상황이다. _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