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고 자신도 없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
마음의 성장통을 겪는 십 대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응원의 메시지
요즘 청소년을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답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절을 안간힘으로 버텨 내는 듯하다. 놀라우리만치 성숙한 청소년도 어딘가에 있겠지만, 대개의 십 대들은 길고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단편 〈로봇과 함께 춤을〉로 제4회 한낙원 과학 소설상 우수 응모작에 선정되면서 등단한 남예은 작가는, 이번 첫 소설집 《선 위의 아이들》을 통해 바로 지금 청소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과 고민을 유려한 필치로 담아내었다. 책에는 〈나쁜 사랑〉 〈코르셋〉 〈선 위의 아이들〉 〈지하철 1호선〉까지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 가운데 〈코르셋〉은 제12회 창비어린이 청소년 소설 부문 신인 문학상을, 〈선 위의 아이들〉은 제8회 어린이와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선 위의 아이들》은 서울문화재단 발간지원사업 선정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늘 가까이 있어 당연한 줄만 알았던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나쁜 사랑〉, 십 대라면 한 번쯤 고민할 법한 성의 문제와 그로 인한 선택, 책임 등의 다양한 감정을 버무려 낸 〈코르셋〉, 더 이상 ‘나’와 주변의 문제에 방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알을 깨고 나가는 〈선 위의 아이들〉, 과거는 자기 의도와 달리 타인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지하철 1호선〉 등 힘든 상황 때문에 좌절하고 휩쓸릴 때도 많지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요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이처럼 《선 위의 아이들》에는 학교 폭력과 왕따, 가족과의 갈등, 이성 간의 문제, 진로 스트레스 등 주변 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고민하는 ‘보통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당장은 아프고 괴로울지 몰라도, 마음의 성장통을 겪고 일어나면 또 다른 길이 열려 있을 거라는 작가의 따듯한 응원이 살갑게 다가오는 웰메이드 성장 소설이다.
“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보통의 아이들을 만나다.”
지극히 현실적이라 더욱 공감 가는 네 편의 이야기
“정말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려는 걸까? 불안한 마음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가려 자꾸만 부석거렸다.” (31쪽)
지금껏 믿어 왔던 엄마, 아빠가 가족의 해체를 결정한다면, 남은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단편 〈나쁜 사랑〉은 민간인 통제 구역인 DMZ에서 태어난 소년 로운이 등장한다. 온 가족이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자유의 마을’에 살다가, 현재는 로운과 형의 학업을 위해 아빠만 그곳에 남겨 둔 채 엄마와 따로 나와 살고 있다.
〈나쁜 사랑〉에서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소개된다. 옆집 사는 설연에게 차이고 비탄에 빠져 있는 로운, 자기 엄마를 보는 것 같아 싫어졌다며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설연, 엄마와 이혼할 거냐는 자식의 물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빠, 그리고 붉은색 루주를 바른 얼굴로 저녁을 차려 주는 정희 아줌마까지. 이런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주인공 로운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으며 ‘결국 나에게 사랑은 나빴다’(42쪽)고 독백하지만, ‘나는 나로 살아갈 거라는’(42쪽) 엄마의 말에 로운은 점점 그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하게 된다.
〈나쁜 사랑〉은 이처럼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순간, 사랑이 다시 시작되려’(52쪽) 하고 있어서 그저 기쁜 로운처럼, 자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스스로를 잘 돌보는 일만이 청소년들의 몫이라고 말이다.
“내 배도 잘라 내고 다듬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다.” (54쪽)
두 번째 단편 〈코르셋〉은 십 대의 임신을 다룬다. 연수는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생선구이 가게로 나가 엄마를 돕곤 한다. ‘엄마가 즐겁다면 나도 즐겁고 엄마가 슬프다면 나도 슬펐던’(57쪽) 연수는 어느 날부턴가 코르셋에 거대한 비밀을 숨기게 되면서, 상황은 조마조마한 긴장감 속에서 흘러가기 시작한다.
제12회 창비어린이 청소년 소설 부문 신인 문학상 심사평에서 〈코르셋〉은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를 소모적으로 다루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것이 발군”이라며, “작품을 든든히 받쳐 주는 낙관주의와 다정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평한 바 있다. 아픈 엄마에게 짐을 지우기 싫어한 ‘착한 딸’이지만 현실은 방황을 숨기기 바쁜 ‘나쁜 딸’이 된 것 같아 끝없이 고민하던 연수는 마침내 자신이 선택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때론 지금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하는 십 대라면, 그 결정을 크게 공감하며 응원하지 않을까. ‘세상엔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다’(95쪽)는 엄마의 말처럼.
“저 선 너머엔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112쪽)
표제작 〈선 위의 아이들〉은 학교 폭력의 목격자이자 가해자로서 스스로를 작은 방에 가둬 버린 열일곱 살 인우와, 가난으로 인해 발목에 끈이 묶인 채로 차디찬 복도에 갇혀 지내야 하는 여섯 살 정운의 이야기다. 설정만 놓고 본다면 무섭고 침울한 스릴러 영화 같지만, 작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묘사하며 두 아이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인우가 느끼는 죄책감과 자기 환멸은 단순히 ‘폭력은 나쁘다’는 문제를 넘어, 아이와 청소년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어른과 사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오며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모습에서, 〈선 위의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눈부신 메시지를 담담하게 선사한다.
“아빠가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제일 잘 아는 나였기에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149쪽)
마지막 단편 〈지하철 1호선〉은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상희가 기억하는 민지는 참 예쁜 아이다. 분홍 원피스를 입고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은 모습, 빨간색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소녀. 그러니 민지가 아직 어린 나이에 주부가 되어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출연하는 장면이 상희는 무척 낯설 수밖에 없다. ‘하늘거리는 벛꽃 같았던’(143쪽) 민지는 생선 가게를 하는 시부모를 도우며 택배 아르바이트를 뛰는 남편과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 벌써 가족을 만든 건지 안타까운 상희는 민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마주하게 된다.
과거는 서로에게 같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작가는 〈지하철 1호선〉을 통해 각자의 시선에서 달라지는 상황을 지난 시간부터 현재까지 치밀하게 포착해 내며, ‘나’에게는 흐릿한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선명한 아픔일 수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