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나기 전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
세계에 가닿을 손끝을 예감했던 것처럼
손목과 발목이 서로 엉킨 채로
두려움이, 또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한 몸처럼 먹고 마시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되기 위해
아끼던 마음을 죽이기도 하니까-「작은 경이」 중에서 접기
기적이라는 건 만년설이 쌓인 미래 같은 것. 그 속에 맥락 없이 존재하는 벼랑은 신의 장난질이지. 무언가 빠르게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서 분명한 통증이 인다. 애인은 갈증이 나는지 침 마른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소리는 허공을 지우는 담배 연기처럼 아스라이 멀어진다. 이제 아사코는 물 잔을 건네며 말한다. 일어나. 반세기가 지났어. 애인의 따듯한 손이 아사코의 손을 잡는다. -「아사코의 거짓말」 중에서 접기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작고 연약한 것들은 서로를 가여워할수록
강한 존재가 되는 법이니까요 -「새와 여자의 출근」 중에서
느리게 말하는 지연의 눈 옆으로 땀방울이 울 것처럼 흘러내렸다. 그녀의 갈색 눈썹이 그림자로 지워진다. 한낮의 공원은 노인들의 힘든 보폭과 강아지들의 어설픈 질주로 푸르렀다. 이 물은 홍제천이고 이 물은 우리를 지나가고 이 물은 한 세계를 잊고서야 한강이 된단다. -「여름의 벤치」 중에서
-이건 먹을 수 있는 거야?
-나도 처음 보는 열매인데……
-그럼 내가 먹어 보고 말해 줄게
-목숨을 걸고 싶을 만큼 먹고 싶은 건가?
-우연에 목숨을 맡기는 거지. 독이 든 열매면 다행이고, 독이 든 열매가 아니라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누가 이런 꿈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만
매번 틀리고 마는 문제처럼-「유칼립투스가 그려진 침대」 중에서 접기
우리가 만든 이 패배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손을 뻗으면 무연히 사라지는,
진창의 사랑을 받아먹으며 발이 푹푹 빠지다
폭죽처럼 터질 생애에서
무너지기 위해 치솟는
단 한 번의 신이 되는 것-「스투키 연습」 중에서
어리석은 엄마가 내게 선물한 것은
여자의 삶이 얼마나 하찮아질 수 있는지
붉은 혀의 거짓말이 얼마나 진실될 수 있는지
돌 사진도 없는 나는 동네 남자애의 이마를 찢어 놓았다
죄 없는 돌멩이
내 죄는 죄 없는 돌멩이에 피를 묻힌 것-「어떤 장례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