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심훈문학상 수상작가 이화정 소설가의 첫 소설집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깊이 있게 자아내는 소설”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천사의 손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화정 소설가의 첫 소설집. 이화정 소설가의 작품은 우리 사회의 규칙을 깨부수고 그 사이에 난 균열을 응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균열이 난 세계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며 그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심훈문학상 심사 당시에도 “트라우마와 연결하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깊이 있게 자아내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심사위원 구모룡·홍기돈 평론가, 방현석 소설가). 추리, 스릴러, SF 등 경계 없는 글쓰기 역시 이화정의 미덕이다.
표제작인 「야생의 시간」은 남편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일상에 권태를 느끼던 ‘나’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야생의 시간’과 맞닥뜨리게 되는 작품이다. 권태로운 일상을 지탱하던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샤’에게 충동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충분히 매혹적이지만 그저 속으로만 들끓는 감정일 뿐이다. 큰 사건 없이 집으로 돌아온 ‘나’는 권태로운 일상을 조율해나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야생의 시간’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때고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나’는 어떤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그 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돌아온 ‘나’는 이전과 같은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해도 삶의 의미가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은영은 문의 손을 느끼며 일어나는 아침에,
타인의 신체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야생의 시간」에서와 같이 이번 소설집 속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끝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이 등장하고 그 고독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모르게 조금씩 해소되기도 한다. 「문」은 ‘문’의 집에 입주 간병인으로 들어가게 된 은영의 이야기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은영은 우연한 사고로 아버지가 죽게 된 후 아버지를 버려두고 무작정 집을 나와 입주 간병인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은 아내를 잃고 사지가 마비되는 증상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문의 집에 함께 살면서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양치를 하거나 면도를 할 수도 없는 문의 손발이 되어주는 게 은영의 일이었다. 고통과 슬픔에 초연해진 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돌보면서 은영은 자신의 상처도 조금씩 낫는다는 것을 느낀다. 「부겐빌레아 속으로」으로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연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병인의 도움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연희는 과거의 사랑했던 이의 기억으로 계속 되돌아간다.
「라스베이거스 여인숙」에서는 임신 거부증으로 네 명의 영아를 살해하고 유기한 홍 할머니의 이야기와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민’의 아내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진행된다. 민은 고레에다 씨의 고향 집을 찾기 위해 함께 D시를 돌아보게 되는데 D시는 일제 강점기 최대 상업 지구로 해방 직후에는 산업화 바람을 타며 전성기를 누렸던 골목을 품은 곳이다. 민은 그곳에서 리노베이션 작업을 하고 있었고 고레에다 씨가 찾는 고향이 바로 D시의 유곽이었다. D시의 리노베이션 사업은 반대파들 때문에 진척이 없다가 반대파의 핵심세력인 홍할머니의 사망 후 급물살을 타게 된다. 민은 생전의 홍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가 아주 고운 삶을 살아온 우아하고 단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네 명의 영아를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고. 홍 할머니의 삶의 내력을 따라가며 소설은 한 개인이 감당해내지 못하는 슬픔과 고독이 어떻게 마음을 병들게 하는지를 그려낸다.
「당신」은 원하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술이 가능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곧 여든을 바라보는 ‘나’는 과거 ‘이레이저 클리닉’ 시술(아픈 기억 삭제 치료)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자신의 어린 날을 견디고 버티게 한 ‘당신’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가 버리고, 기억 속에서까지 지우려 한 ‘당신’은 ‘그이’의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온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지우는 데 성공했지만 ‘당신’의 기억을 지우는 데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은 ‘그이’의 얼굴을 하고 되살아난 것이다. ‘나’와 ‘당신’, ‘그이’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뒤엉키면서 독자를 매혹한다.
『야생의 시간』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이 독자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키지만 그중에서도 「천사의 손길」의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아들을 잃은 화자와 엄마를 잃은 소년의 만남으로 얼핏 서로가 서로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대안 관계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소설은 뜻밖의 방법으로 두 사람을 견고히 결속시킨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심사 당시 “아들을 잃은 화자와 엄마를 잃은 소년의 만남을 택시호출(천사호출)로 연결하고, 화자의 남편이 소년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추리기법을 동원해 끝까지 긴장감을 잘 이끌었다”(심사위원 이순원·이상섭 소설가)는 평을 받았다.
이화정의 소설은 다채롭다. 강렬하게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그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대게 한다. 어쩌면 나쁜 놈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선악의 구도로 세상을 납작하게 들여다보는 대신 나쁜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더욱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