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심훈문학상 수상자 지혜 소설가의 첫 소설집
“출처 없는 소문, 발 없는 말, 여자를 잡아먹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서술의 경제학이라는 면에서나 인간 탐구라는 면에서나 돋보인 작품”(최윤, 황종연)이라는 평과 함께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볼트」가 당선된 지혜 소설가의 첫 소설집. 당선 소감에서 “나를 스쳐간 많은 죽음, 죽은 사람들, 죽음 앞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힌 것처럼 지혜 소설가는 지나간 이야기들을 끝없이 되살리며 쓴다. 이번 소설집 『북명 너머에서』에는 사그라지는 기억 너머의 풍경을 오랫동안 매만지고 다듬은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북명 너머에서』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오랫동안 그리워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지나간 이야기들과 잘 헤어지기 위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리운 마음을 꾹꾹 눌러 쓰면서 국도변 산속의 공장으로(「볼트」), 1970년대의 북명 백화점으로(「북명 너머에서」), 수상한 소문이 가득했던 칠영동(「삼각지붕 아래 여자」) 등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읽기 시작한 순간 곧바로 독자들을 그 장소로 데려다놓는 작가의 필력에 심훈문학상 심사위원(구모룡·홍기돈 평론가, 방현석 소설가)들은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과거 재현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고 평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하고도 나눌 길이 없는 특정 시간대에 닿기 위해서 소설을 읽고 쓰는지도 모른다. 어떤 추천의 말로도 전달될 수 없는 지혜의 문장과 장면들 속으로 누구하고라도 같이 들어가보고 싶다고, 나는 이 소설들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생각했다._최은미(소설가)
잃어버렸기에 귀중한 것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것들이 우리의 현재를 가만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혜의 소설들은 심상하게 고백한다._이은지(평론가)
“어떤 과거는 우리 주위를 떠돌다
머릿속 피가 빠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순간
몸속으로 들어와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재현하고 떠나간다.
섬광처럼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
데뷔작인 「볼트」는 야산의 공장에 기거하는 삼촌을 찾아간 조카의 이야기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불법 체류자로 일한 삼촌과 그렇게 일한 삼촌이 집으로 부친 돈으로 조금씩 생계가 나아진 조카가 만난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도는 것 같으면서도 통하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기이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능해지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와 더불어 그 속에서 폭력적으로 끈끈해지는 아이러니한 가족관계에 대해 들여다보게 된다.
표제작 「북명 너머에서」는 1970년대의 북명 백화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일하며 만난 성자와 조옥이 친밀함을 쌓아나가는 과정과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흐트러지는 과정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그 장소의 냄새까지 느낄 수 있을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성자가 그 모든 과거를 반추하는 일은 병상에 누운 남편이 열에 취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전우들의 이름을 외는 일과도 겹쳐진다. 어떤 기억은 몸에 새겨져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끝없이 되살려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자는 다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자신의 오랜 기억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북명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며 그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한 이 작품은 2023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으로도 선정되었다. 심사 당시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계속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정이현 소설가), “클래식한 형태의 이야기임에도 강약 조절을 잘하면서 과거를 반추한다.”(박인성 평론가), “오래전의 분위기가 주는 맛이 있다. 성자와 조옥의 호감과 애정이 있던 관계를 세련되게 풀어낸 점도 매우 돋보인다”(심진경 평론가)는 등의 평을 받았다.
시신을 염하는 일을 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담은 「염」과 타운하우스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풀어낸 작품 「구목(丘木)」, 용을 사육하는 사육사의 시선을 담은 「멸망자를 위한 생크추어리」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도태되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보존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볼트」에서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 속 한 남성상에 대해서 그려냈다면 다른 작품들에서는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삼각지붕 아래 여자」 역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칠영동’이라는 장소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어린 시절 살았던 저마다의 동네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어디에나 이상한 소문이 있고 소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인물을 타자화하며 그저 한순간의 오락거리로 그들을 사연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비해버리고 만다. 이때 주로 대상이 되는 것은 가부장제 바깥에 있는 여성이며 작가는 그 과정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집요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곁」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딸과 그 손녀를 돌보기 위해 처음 해외로 가게 된 경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도를 갈 때 외에는 비행기를 타본 일이 없고 가족 외의 사람에게는 쉽게 곁을 줘본 적이 없던 중년 여성의 삶이 미국이라는 아주 낯선 곳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그려낸 일종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
「연희의 미래」는 서로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사이좋은 세 자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비밀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비밀이 보호되는 한 지속되는 아이러니한 친밀함과 자매 사이의 애틋한 감정과 연대를 그려내고 있다.
사라지고 사그라진 기억 너머의 기억
지혜는 소설을 통해 분명 존재했지만 이제는 기억 저편에 묻힌 어렴풋해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려는 듯하다. 그 시간과 인물들을 아주 생생하게 재현해낸다는 점이 지혜 작가의 큰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아이러니한 세계는 때론 아름답고 때론 기이하다. 그 기이한 아름다움이 『북명 너머에서』를 계속 되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