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강을 넘기 직전 누군가 뒤에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말렸다면 나는 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몸과 마음이 더 깨끗하고 건강할까? 알 수 없다. 인생에는 만약이 없다. 야구가 그렇듯이. (15쪽)
나는 내가 좋고 편하고 잘하는 방식으로 야구를 마음껏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그랬더니 엄청난 일들이 생겼다. 남들은 나를 ‘성덕’ ‘슈퍼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야구에 입문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하면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어느 선수건, 어느 팀이건 좋으니 그냥 한번 야구를 보시라고. 그러다가 어느 쪽에 흥미가 생기면 한껏 좋아해 보라고. (73~74쪽)
유니폼 등 뒤에 박힌 번호가 아닌 가슴에 걸린 그 이름을 위해 뛰라는 말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유니폼 앞의 팀 이름에 뒤에 걸린 숫자가 합쳐지면 그 감동은 더 커진다. (186쪽)
“선생님은 레드삭스를 정말 사랑하죠. 그런데 레드삭스도 선생님을 사랑해주던가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Fever Pitch〉에 나오는 그 학생의 대사에 나를 포함해 잠시 멍했던 사람들이 분명 꽤 있었을 것이다. (199쪽)
다른 공보다 크기도 작고 흰색이라 사인을 받아 보관하기도 좋아서 전 종목 중에서 사인볼이 가장 많은 것도 야구다. 야구공은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와 팬을 더 밀접하게 연결하는 매개체다. 방망이, 글러브를 사용하고 베이스가 있어서 이름조차 ‘베이스볼’이 지만 언제나 야구를 상징하는 것은 빨간색 실밥이 그려진 야구공이다. (237쪽)
마라도나는, 그리고 그의 두 골은 단순히 점수와 숫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묘한 점이다. 결국은 숫자의 합으로 승리를 얻고 그것이 최고의 가치인데, 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숫자 뒤에 있는 다른 것들이다. (265쪽)
잠실구장에 가까워지면 냄새가 난다. 그냥 코로 느껴지는 후각에의 특정한 자극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과 마음에까지 와닿는 그런 ‘냄새’가 난다. 지하철역에서 내리는 날엔 이미 플랫폼에서부터 그 냄새가 종합운동장역에 진동을 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의 유니폼과 모자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개찰구를 지나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음료수랑 오징어를 놓고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서 나는 것 같고,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탕탕 쳐보는 응원봉에서 나는 것도 같다.
(……)
중계로 얻을 수 있는 그 많은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바로 이 냄새. 다시 보기도 없고, 친절한 설명도 없는 데다 때로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봐야 하고,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공이 어디 있는지 찾는 데도 한참 걸리고, 비좁은 좌석에 가방 둘 곳도 마땅치 않고, 화장실에 가려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몸을 굽혀 나가야 하는 이 불편함을 모두 이겨내는 이 냄새. 바로 이것 때문에 야구팬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려 따라간 아이들처럼 잠실구장을 찾는다.(224~226쪽)
야구는 정말 입체적인 경기다. 수많은 선수들이 구석구석에서 자기 역할을 깔끔하게 해내고서야 비로소 한 경기를 이길 수 있다. (328쪽)
빗맞은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2루수 신민재의 글러브로 들어간다. 해냈다. 엘지트윈스가 1994년 통합 우승 이후로 29년 만에.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순간을 상상했다. 어떤 기분일까. (…) 역시 오지환이 가장 많이 울까. 아니면 임찬규가 뛰어 나오지도 못하고 덕아웃에서 울고 있을까. 의외였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약간 따뜻해지는 느낌 정도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마운드로 몰려가는 선수들의 뜀박질도 느린 화면으로 보인다. 그동안의 한과 설움이 소용돌이 치면서 적어도 몇 분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음속에는 한 문장만 떠오른다.
“이게 뭐라고….” (343쪽)
감정이 조금씩 올라온 건 관중석의 엘지 팬들을 바라보면서였다. 저 많은사람들의 삶에서 겹치는 것이라고는 엘지트윈스 하나 정도일 텐데 저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수건을 들고 똑같은 마음으로 야구장을 지켜보고 있었구나. 이 순간을 직접 눈에 담기 위해서 그렇게 어렵다는 티켓 전쟁에 뛰어들고 또 성공한 거구나. 누군가는 두 팔을 들며 활짝 웃고 누군가는 몸을 숙여 오열하는 모습을 보니 그 안에 내가 보였다. 그 긴 시간 동안 환호하고 좌절하고 기뻐하고 슬퍼했던 내 모습이 모두 담겨있었다. 그래, 참 긴 시간이었다. 20대였던 내가 50대가 되었으니. (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