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주지 못한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
아이일 수도, 어른일 수도 없었던 ‘그 형’
아이의 두 눈에 비치는
폭력의 흔들리는 잔영
‘그 형’을 만났다
집과 학교,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낯선 동네로 이사를 온 내겐 아직 친구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철봉에 매달려 있는데 한 무리가 나에게 다가왔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에 내 말을 비꼬아 놀리는 말투와 킥킥대는 비웃음까지. 어딘지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괴롭히기 쉬운 표적이 되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돈을 빼앗기려는 순간, 그 형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형의 큰 소리 한 번에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잔뜩 겁먹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과 또 한 번 마주치길 기대하고 있었다. 형에게 줄 감자칩도 매일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문구점에서 형을 다시 만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위기에 처해 있던 외로운 나를 구해 준, 멋진 어른 같았던 형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형은 문구점에서 샤프를 훔치고 있었다.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대체, ‘그 형’은 어떤 사람인 걸까?
그 형의 그림자
그런데 다음날, 형을 우리 집 건물 계단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형은 바로 위층에 사는 주인집 아들이었다. 갑자기 형이 나에게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한다. 날 괴롭히던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했던 형의 말투가 이제는 나를 위협하는 것만 같다. 거절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피아노 학원이 끝나자마자 형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모종삽으로 땅을 파며 개미를 잡고 있던 형이 갑자기 그 개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형에게 소리를 쳤다. 그래도 형이 멈추지 않아 나는 형을 세게 붙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형이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하던 걸 멈췄다.
나는 형이 학교에서 교내 방송에 나올 정도로 똑똑한 모범생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게다가 형은 일진 무리에게 놀림당하던 나를 구해 준 사람이다. 그런 형이라면 분명 멋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형은 나의 영웅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선 샤프를 훔치고 개미를 잔인하게 죽인다.
“왜 그래요? 형!”
만들어진 세상에 갇힌
형의 진실
우리의 집주인 아저씨는 점잖고 교양 넘쳐 보이는 데다 학교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 그리고 그 아들, 형은 6학년 반장을 맡고 있는 데다 학교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장이 방안에 가득할 만큼 똑똑하고 완벽해 보인다. 동네의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또 부러워할 듯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그런데 그 형이,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나에게 하나둘씩 꺼내 놓는다. 그렇게 보게 된 모습들은 하나같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곳에는 집주인 아저씨가 견고히 쌓아 온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엔 차마 바라보기 힘든 진실이 있다. 바로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가 완벽해 보이는 아들에게 남몰래 저지르고 있는 폭력이다. 완벽하게 번쩍이는 진열장 바깥에서만 바라봐 온 이들에겐 쉬이 닿을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형은 그 진실을 그저 홀로 삭여 가며, 아버지가 지어 놓은 견고한 미로 밖으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세상 바깥에 속해 있던 내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형은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진열장에 비친 겉모습에 익숙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저 아이는 나의 탈출구가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몰랐기에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보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형은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번쩍이는 신호를 나에게 드러냈던 것이다. 마지막 조난 신호 같은 자신의 상처를.
“진실을 보아 줘, 나를 지켜 줘.”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폭력의 모습
전작 『편의점』에 이어 가정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아낸 이영아 작가의 이번 이야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형의 모습을 좇아가는 ‘나’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이 ‘그 형’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감정들을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그 형』의 서사 구조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폭력의 직접 대상자인 ‘그 형’이 아니라 그 형을 지켜보는 ‘나’의 몸을 통해 형의 공포와 불안함을 간접적으로 전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지가 되어야 하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어른이어야 할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느껴야만 했을 한 아이의 당혹스러움과 초조함,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은 바로 그 아이를 의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어른으로 여겼던 또 다른 아이, ‘나’에게로 오롯이 전달됩니다.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잠재된 불안함과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주인공인 ‘나’가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공포는, 곧 ‘그 형’이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느꼈을 헤아릴 수 없는 무력감과 연결되어 있겠지요. 그러므로 ‘나’에게 ‘그 형’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은 곧 ‘그 형’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고, 이 주제는 다시 ‘아이에게 어른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불편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
이영아 작가는 격정적이거나 감정적인 표현 없이, 일상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담담하고 간결한 글투만으로도 이상하리만치 독자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별일 없을 것 같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그 무수히 많은 불편한 일들이 있음을 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곁에서 소리 없이 저물어 가는 그 수많은 조난 신호의 불씨가 ‘불편함’을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힘을 싣고 있습니다.
그림은 『토라지는 가족』을 그린 이현민 작가가 맡았습니다. 진실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 그 너머 감추어진 빛과 그림자의 속살까지도 진득하게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듯, 작가는 거친 붓 자국으로 시선과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모습을 마치 일렁이는 렌즈에 비친 듯한 독특한 색채와 인상으로 풀어냈습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시작되는 책, 『그 형』.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에 선득하게 비치는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이영아 작가의 목소리가, 단 하나의 장면도 한 사람이 가진 프리즘을 통해 수천수만 가지의 빛을 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한 이현민 작가의 그림을 만나 현실을 마주한 우리의 ‘시선’과 ‘태도’에 따라 아이들의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