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은 종교 이전에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려 지금도 우리네 삶 속에서 행해지는 영등 신앙, 수목 신앙, 칠성 신앙 등 고유신앙의 사회문화적인 진화 과정과 전파 경로, 다원적 변화에 대하여 구체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그 엉킨 실마리를 풀어 보고자 하였다. 늘 응원해 주시고 도와주신 분들 모두 “남의 눈에 꽃이 되고 잎이 되기 발원이요.”라고 영등, 수목, 칠성님께 빌어 볼 판이다.
[책 속으로]
영등할미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을까? 이 의문의 해답은 신들의 고향 제주도에 있었다. “사공은 사자 밥 지고 칠성판에 오른 목숨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뱃일에 목숨을 걸고 다니는 섬 지역은 전 세계 어느 지역이나 풍신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는 해양 문화의 특성상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신들의 천국이었다. 영등할미 또한 제주도의 각별한 신으로 마을 단위로 보름 동안 영등굿을 따로 벌일 정도로 각별하게 모셨다. 음력 2월 초하루는 제주 전역에서 맞이굿을 하고, 15일에는 송별하는 배송굿을 하는데, 그 규모는 육지 어느 곳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상당했다.
제주의 영등할망은 단순하게 비바람만 몰고 오는 신이 아니라, 예부터 좀녀潛女 또는 잠수潛嫂라 불리는 해녀들의 수호신으로 보말, 미역, 소라, 전복 등의 씨를 가져다주고, 어부들의 어선을 보호해 주는, 하는 역할이 뚜렷한 해양 신격이었다.
-p. 21~23, ‘영등할미는 누구인가?’ 중에서
남해안 지역은 2월 초하룻날 새벽에 영등을 모실 때나 보름에 승천할 때, 각 가정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주관하였다. (중략) 이 기간은“하지 말라”라고 하는 금기 또한 어느 때보다 세었다. 영등할미의 심기를 건드려 동티가 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논밭 갈이 등 땅을 다루는 일이나 해녀들의 물질도 금했다. 하물며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도 금했고, 특히 쌀을 집 밖으로 내는 일을 엄격하게 금했다.
여성들이 이때 장을 담그면 장에 구더기가 생긴다고 금했고, 심지어 빨래도 금했다. 부정을 타면 안 되기에 상갓집에도 얼씬을 하지 않았으며, 아이를 낳은 집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특히 이 기간에 혼인을 하면 영등할미의 시샘을 받아 그 부부는 벌을 받아 파혼된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어, 오늘날에도 음력 2월 내내는 결혼식을 피하는 풍습이 이어진다.
영등 금기의 속을 들여다보면, 엄동설한 추위에 바깥일을 해야 하는 여성과 일꾼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슬쩍 비친다. 영등달은 얼음도 녹고 햇볕은 따뜻하지만, 잎샘 꽃샘이라 부르는 겨울보다 더한 찬 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이때 봄이 왔답시고 들일이나 물질을 하거나, 찬물에 손을 넣으면 몸이 상할 수 있기에 이런 금기를 만들어 노동적 약자를 보호하는 참으로 따뜻한 민속이었다.
-p. 62~64, ‘남해안의 영등 신앙’ 중에서
예부터 우리 풍습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이름을 걸고 나무를 심는 ‘내 나무’ 풍습이 있었다. 딸을 낳으면 집 앞에 오동나무 몇 그루를 심어 딸 나무라 칭했고,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그 아이 몫으로 소나무를 몇 그루 심어 이를 아들 나무라고 칭했다. (중략) 이러한 내 나무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메이카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태반을 땅에 묻고 가족과 친척들이 묘목을 심었다. 인도에서도 여자아이가 한 명 태어날 때마다 111그루의 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다. 중국 저장성 리수이 지방의 속담에 이르길 “18년 수목은 재목감이 되고, 18년 후에는 벼슬길에 오르는 성인이 태어난다”라고 하여, 아이를 낳으면 태어남을 축하하는 나무를 심는 풍속이 있다.
항저우시 위항에서도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뜰 한쪽에 한 그루의 비파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을 동갑내기 나무라고 불렀다. 또 여자아이가 처녀가 되었을 때, 청명 한식에 연모하는 총각이 그 처녀의 ‘내 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했다.
-p. 75~76, ‘내 나무’ 중에서
집은 사람이 살기 전에 앞서서, 먼저 집을 잡귀 잡신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호신인 성주신이 깃드는 곳이었다. 우리 민족은 대대로 살아가는 주택의 뼈대로 기둥, 납장, 중보, 소래기, 상보, 추녀, 연목까지 전부 소나무를 썼다. 그래서 집을 지을 소나무를 구할 때부터 대목장은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특히 새가 먼저 둥지를 튼 나무는 아무리 근사해도 ‘새 성주’가 들었다고 절대 베지 않았다.
대들보용 소나무가 결정되면 대목들은 작은 고사상을 차려 “아무개 집 성주목으로 모십니다.”라고 고하고, 극진히 예를 표한 다음 벌목을 했다. 재목으로 쓰인 소나무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은 소나무지만, 성주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성주가 머무는 집’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p. 90, ‘성주신이 된 소나무’ 중에서
별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천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분야였다. 별자리는 유목 민족에게는 거대한 초원에서 길과 방향을 알려주는 좌표였고, 농경 민족에게는 계절과 날씨를 측정하는 척도였다. 그래서 동서양은 각각 하늘의 별을 연결하여 신화적인 인물, 동물, 사물, 관직 등의 이름을 붙여 설화를 만들어 후세에 천문학 교재로 전하였다.
동서양 모두가 해와 달과 별의 천체 현상이 자연과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라고 믿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간이 태어난 해와 날짜와 시간에 해당하는 띠와 별자리를 통해 소원을 빌거나 미래를 점쳐보는 점술이 발달하였다.
해와 달과 별을 표현한 성혈 속에는 우리가 서구식 천문학으로만 알고 있었던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오리온자리 등이 아닌, 우리 심상으로 바라본 우리 별자리가 있었다.
대표 우리 별자리 격으로 한민족에게 생명을 주는 삼신할미가 계시는 삼태성이 있었고, 또 항시 사시사철 밤마다 우리를 보살펴 주는 북두칠성이 있었다. 황제 별인 북극성이 있었고, 동쪽 하늘에는 청룡 모양의 별자리, 남쪽에는 환상의 새인 주작 모양 별자리, 서쪽에는 백호 모양 별자리, 북쪽에는 신령한 거북이인 현무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p. 167~168, ‘우리 별자리’ 중에서
전쟁은 갈등, 배신, 연합, 복속, 확장 등 복잡한 요소가 얽혀 발생하는 최후 수단이었다. 그래서 전쟁과 점복은 매우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대부터 전쟁은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나 말이나 양을 잡아 그 발굽이나 심장 등의 상태를 보아 제사장이 길흉을 판단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난중일기』에는 10여 차례 척자점擲字占을 본 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도 어떤 이유로 점을 보았으며 나온 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중략) 전선에서 군사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수군 장수로서 이순신은 척자점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괘가 맞으면 매우 오묘하다고 찬탄하기도 했다. 그 기록의 대부분은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전투의 출전 여부, 전황의 길흉, 그리고 수군답게 기상을 살펴보는 윷점 등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중에는 아내 방씨와 아들 면과 영의정 류성룡의 병세에 대한 걱정으로 척자점을 본 기록도 있다. 전선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장수로서, 가족과 벗의 병중 소식에 지아비와 아버지와 벗으로서 속만 태우는 딱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이순신의 일기에 나오는 척자점에 대한 기록은 세시풍속으로 국한되었던 윷점이 꼭 이겨야 살아남는 절박한 수군 작전의 점복으로도 쓰였다는 점과 윷점의 풍속이 이미 조선 중기에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p. 209~212, ‘윳점과 늇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