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우리가 부나 명예와 같은 세간적인 가치들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희희낙락해 있는 상태야말로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본다. 세간적인 가치들이야말로 언제든 쉽게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취약한 것이고 죽음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헛된 것이 된다. 따라서 세간적인 가치들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에 희희낙락하는 것이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절망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14쪽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아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는 절망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정한 자아를 완전히 망각하면서 삼켜 버릴 수 없다. 그 안에는 항상 불안과 불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절망은 진정한 자아를 망각하면서 삼켜 버리려 하지만, 그것을 망각하고 삼켜 버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육체가 육체의 병에 의해 삼켜져 버리는 일은 있어도, 영혼은 영혼의 병인 절망에 의해 완전히 삼켜지지 않는다. 진정한 자아는 항상 내면에 잠복해 있는 것이다.
―48쪽
그는 유한성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한성 속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는 삶은, 유한성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는 삶이기에 유한성에 완전히 빠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된 자아와 무한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러한 인간은 절망 속에 있지만 의식적으로는 이러한 절망을 느끼지 못한다.
―81쪽
그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인격자로서 명성을 얻으며, 인격자로서의 명성을 향유하고 교양 있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목사들의 축복을 받을 경우, 그는 자신이 절망을 극복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그의 상태야말로 절망이다. 이러한 절망은 아직 심미적 실존의 순진한 직접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경우 절망한 자가 행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라는 것도 심미적 실존으로서의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질적인 반성이 아니라 심미적 실존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는 한갓 양적인 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116쪽
키르케고르의 이러한 입장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그리스도교 사상가에게서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평안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신만이 죽음으로 끝나는 유한하고 덧없는 현실에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영원성과 평온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은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게 되는 그 모든 존재자와 사건을 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껴안고 긍정하는 넓은 마음을 선사한다.
―150쪽
키르케고르는 모든 절망이 결국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간 것이 바로 신에게 반항하는 남성적 절망이라고 본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모든 종류의 절망은 남성적인 절망으로 환원될 수 있고 소급될 수 있다고 말한다. 허무주의적 염세주의라는 것에도 결국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고 신은 없다고 보는 인간에 대한 오만이 잠재해 있다. 이 점에서 허무주의적 염세주의는 언제든지 신에게 저항하는 남성적 절망으로 변화될 수 있다.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