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면서 소멸과 생성의 윤회하는 자연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10일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아버님의 별세가 소멸의 섭리를 따른 것이라면 큰딸의 결혼은 생성의 원리일 것이다.
미약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것이었다.
지난 10일간의 시간이 긴 건지 짧은 건지 아직은 혼란스럽다.
-〈10일간의 일기〉 중에서
차 씨앗 한 알이 땅에 심어져 온갖 풍상을 겪으며 자라나 잎을 피우고 거둬져 아홉 번 불에 데워지고 비벼져 바짝 말라 다시 맑고 뜨거운 물에 우려져 차향을 방 안 가득히 뿜으며 마셔지기를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란 무엇인가?
내가 이 정성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받아 마실 자격이 있는가?
또 차 한 잔 대접 받는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간은 어떤 인연들로 짜여 있는가?
-〈차 한 잔〉 중에서
겨울이 자리를 비껴나고 청보리가 부드러운 잎사귀를 힘차게 피워내면 보드라운 봄바람이 지나며 흰 파도를 일으킨다. 봄기운이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일어나고 아이들이 호들기를 만들어 불며 들길을 내달릴 때쯤 되면 제비꽃, 산자고가 피고, 진달래와 찔레꽃 이피어나면 종다리는 봄 하늘에 높이 떠서 지저귄다. 그때면 여지없이 백설희가 불러 유행을 시켰던 〈봄날은 간다〉 노래가 들려온다.
-〈봄날은 간다〉 중에서
지금은 비록 쓰러져 자신이 300년 동안 자란 땅으로 되돌아가 잔해만 남긴 뒤란 대밭에 푸르던 팽나무 잎이 지는 밤, 대나무끼리 비벼대며 내던 처절한 울음소리며 싸락눈발이 바람과 함께 댓잎을 쓸며 창호지 문을 넘어와 나를 진저리치게 했었다.
젊은 날 집 떠나 이제 돌아와 편안히 누운 대청마루에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막 꺾어온 죽순을 다듬다 평생 대밭을 끼고 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우후죽순을, 너와 얽힌 애증을, 변한 세태를 생각한다. 최소한 내 안식 터를 넘어오는 너의 집요한 욕망을 꺾어버릴 묘책은 없을 듯하다. 고향을 굳건히 지켜준 너와의 공존과 싸움을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아갈 약속을 한다.
-〈죽순竹筍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