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마음은 벼이삭이었습니다. 화려한 치장을 털어내고 누렇게 고개 숙이니, 타닥타닥 깨달음 알갱이들이 쏟아졌습니다. 제 일생의 모든 여정은 주님의 작품이고 신비였습니다. 유아영세로 신앙을, 맑은 열정으로 초등교육 동심을, 노래와 기타 연주의 달란트로 봉사를, 장거리 도보와 산행으로 체력을 키워주셨습니다. 상실과 질곡의 삶을 견디며 마음근육을 굳혀 글을 쓰게 해주신 후, 미소한 형제 하나에게 베풀 듯 병들어 힘든 남편을 돌보라 하십니다. 이에 순명으로 뜻을 따르려 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가장 큰 네 번째 십자가, 햇살 받아 번쩍번쩍 빛이 나는 저 무거운 십자가가 바로 내 것이라 믿었다.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둘러메려 했다. 앗! 꼼짝을 않는다. 키를 훌쩍 넘기도록 크고 무거운 십자가는 메기는커녕 들 수조차 없었다.
‘아, 이렇게나 무거운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로구나!’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는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음을 십자가 체험을 통해 여실히 깨달았다. 조심스레 겸손이 다가왔다. 내 키와 비슷하고 어깨를 다소 누르는 듯 무게감이 느껴지는 세 번째 십자가를 안겨주었다. 나에게 맞는 십자가는 주님이 완전히 쓰러지셨을 때도 나는 감내할 수 있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충분히 질 수 있는 그만큼의 것이었다.
나는 긴 세월 혼자서만 등짐을 진 듯 버거워했다.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내가 메고 와 내려놓은 십자가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레 섞이고 어울렸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 십자가를 메고 와서 내려놓았으리라. 이후에도 또 숱한 이들이 그러하리라. 거대한 십자가에 대단한 인내심인 양 으스대던 오만이 성찰과 참회에 든다.
내게 맞는 십자가를 찾아 거뜬히 지고 갈 수 있음에 감사하는 순간, 하늘이 번쩍 안아주셨다. 바람이 불어와 등과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한 말씀이 들려왔다.
‘이제, 등짐을 내려놓고 시원하게 가십시오!’-<이제, 등짐을 내려놓다> 중에서
성지 광장 위쪽엔 묵주의 돌 20단을 펼쳐 놓았다. 너른 산 배경으로 지름 약 70cm의 회색빛 화강암 둥근 돌 묵주 알들이 4~5m 정도 떨어져 기도 대기 중이다. 돌들을 어루만지며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천사들이 내려와 하늘에 뜻을 전달하는 듯하다. 기도가 떠받히는 영험함에 발걸음은 넓은 기도동산을 구름처럼 흐른다.
침묵 중에 시누이 요세피나를 생각한다. 그녀는 성모님을 참 많이 닮았다. 젊은 시절 수녀 되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님밖에 모르는 신심으로 칠십 평생을 혼자 살아왔다. 그녀에게선 절제, 청빈, 정결 등의 향기가 피어난다. 성경 속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중의 마르타처럼 앞장서서 주님을 환대하는 일에 분주하지 않다. 고요 중에 주님 말씀에 경청하는 마리아처럼 신앙의 그윽한 들꽃으로 핀다.
뇌출혈로 쓰러져 마비된 남편과 똑같은 병으로 마비되신 시아버님 두 분을 혼자 단칸방에서 대소변 받아낼 때였다. 큰올케인 내게 너무나 큰 짐을 지울 수 없다며 시집도 안 간 시누이가 아버님을 모셔가 돌본 일은 크나큰 감동이었다. 아버지 투병의 뒷일을 돌보면서 작게나마 효도를 하고 큰 깨달음이 있었다며 감사해했다.
세속에 살면서 수도회나 수녀원처럼 공동생활은 하지 않지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재속회의 책임을 맡고 있다. 마음이 고운 요세피나를 따스한 성모님 품에 안겨, 암 투병의 고통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간청한다. -<그 품에 안기다> 중에서
다른 성지와 다르게 이곳 안내판엔 순례의 순서를 일목요연하게 게시해 놓았다. 먼저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 흉상 앞에 서서 신부님의 행적을 기억하며, ‘사제를 위한 기도’를 바치라 권한다. 다음은 성지 돌아보기다. 야외 제대 광장과 다양한 꽃들로 성모정원을 묵주기도 하며 걷는다. 이어지는 평화의 길에선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한 구절씩 나무 게시판에 걸어놓은 말씀을 묵상하며, 평화의 기도 정신을 가슴에 새기라 한다.
십자가의 길도 특별하다. 대부분의 성지들이 14처로 끝맺는데, 이곳은 특히 15처가 독특하고 신비롭다.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놓았다. 곁에서 성모님과 사도 요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의 경탄하는 표정도 인상적이다. 끝 순서로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라 한다. 순서대로 따르니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차분하게 영성이 차오르는 풍선 기쁨이 좋다.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 곁에 다시 서서 묵상에 잠긴다. 비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언젠간 지고 말 나의 삶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않는다는 복음성가가 떠오른다. 인내함이 다 이긴다고,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한다고 속삭여준다.
피정의 집을 나오기 전, 조선희 신부님 유언 중 ‘내 영혼의 반’ 말씀 잔상이 맴을 돈다. 앞으로 내 영혼의 반은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까. 칠십을 훌쩍 넘긴 시점에 서 있다. 물질, 명예, 인정 등에 크게 의욕이 일질 않는다. 다만 주님이 가신 길처럼 고난으로 깎이고 이타심으로 다듬어져 주님의 눈에 들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내 영혼의 반은 어디에>
숲정이 순교성지는 숲이 울창하다는 뜻으로 ‘숲머리’ 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주변이 논밭이다. 뒷말을 거쳐 배다리에 다다르니 하천에 수장되었을 아낙네 순교자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장터와 가금 터를 지나 동헌 백지사 터에 들어섰다. 대형 십자가 앞에 백지사형을 당하는 순교자의 얼굴이 하얀 종이에 덮인 성화 조각상 앞에 섰다. 코와 입에 붙은 백지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현기증이 났다.
여산의 숲정이, 동헌, 전주 옥 터, 배다리 등지에서 참형을 당한 순교자들은 가까운 천호성지 등에 묻혀 있다. 주님만을 믿고 따르며, 오직 주님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교자들의 죽음이 내 신앙 삶에서 결코 떠나지 않게 기도를 붙잡으며 살고 싶다.
성모님은 신자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기도의 꽃다발을 매일 받으시고 얼마나 기쁘게 아버지 하느님께 전해주셨을까. 혼자만 속으로, 겨우 어쩌다 드리는 나의 짧은 기도가 얼마나 미진하셨을까. 주님께 전하지도 못한 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매일은 아닐지라도 자주 장미꽃 50송이씩을 낭랑한 소리로 울려드리려 마음먹는다. -<하늘 문을 여시는 곳> 중에서
많이 걸었다. 나는 이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한없이 부족하고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그저 생명을 연장하고 있을 뿐인가. 생을 다 살아보지도 못한 채 낙엽처럼 떨어진 코로나 희생자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음을, 그들이 나를 대신해 준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노숙자들의 버려진 듯 고된 삶도 가슴을 찌른다. 나만 문제없으면, 나만 괜찮으면, 약간만 아픈 채 살면 되는 걸까.
중림동성당 부근은 염천교, 서울역이 가깝다. 여전히 비닐봉지와 쓰레기들이 수두룩하니 버려져 쌓여 있다. 거적때기를 걸친 노숙자들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저들도 귀한 생명일진대,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에 눈물만 흐른다.
주님은 손이 없고, 발이 없고 얼굴이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어떤 형상으로든 살아계신다. 아픈 이 힘든 이를 잡아주라는 손, 그들을 돌보라 이끄시는 발, 순교자들을 바라보게 하시는 마음, 곧 나의 주님이시다. 생명을 봉헌한 순교자들이 비록 몸은 썩어 흙이 되었을지라도, 해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싹을 틔우고 잎과 꽃, 열매로 주님 사랑의 향기를 곳곳에 흩날려주시리라. -<생명을 봉헌한 순교자의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