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의 노래/ 박 설 희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딛는 곳마다 진창이다
어디가 진창인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어제는 자매간에 설화舌禍를 부르고
오늘은 풀려던 실타래가 더욱 꼬이고
내일은 삐끗해서 드러눕게 될지도
제 등에 불을 짊어지고
푸른 초원을 동경한 사자 이야기처럼
진창은 내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게 아닐까
까마귀가 까마귀의 꿈을 꾸는 것처럼
진창은 진창의 꿈을 꾸겠지
오늘은 진창 속에서 새의 깃털을 건졌다
어제는 얇디얇은 흰 꽃잎을
내일은 눈이 흩날릴지도 모르겠다
구름도 바람도
진창에서 나온 것
탁하게 젖은 하루
털고 말리고
조금은 말개진 표정으로
허밍허밍
박설희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가슴을 재다』 외,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등 있음.
소인국/ 임 경 묵
꽃집 앞을 지나다가
좌대에 나란한 소국小菊 화분을 본다
올망졸망 소인국 같다
둥근 국경을 맞대고
연신 꽃망울 부풀고
하양 노랑 자주 꽃을 피우는 걸 보면
산아제한도 없는 듯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지는 꽃이 더러 있으나
그마저 향기롭구나
오직 꽃으로만 일국을 이루었으니
꽃다운 국가다
아, 시방 눈앞에서
자주 꽃 포슬포슬한 소인국 하나가
영문도 모른 채
통째로 거래되고 있다.
임경묵 2008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체 게바라 치킨 집』,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등 있음.
일어서는 숲/ 이 복 현
폭풍은 숲을 이기지 못한다
우우 우 우우
나무들은 짓밟히고 휘어져도
다시 일어나 저항한다
풀잎 하나도
온몸으로 바람에 맞서며
빳빳이 고개 들고 일어선다
이파리 하나하나가
숲의 주인임을 선포한다
나무와 풀들은 무기가 없다
폭풍을 베어 넘어뜨릴 칼이 없다
하지만 함께 어우러져
단단히 스크럼을 짜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숲을 지킨다
보라!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의 고요한 평화
부러진 나무의 상처 위에 빛나는
눈부신 햇살을
꺾이고 넘어져도
쓰라림과 신음을 죽이고
푸른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인 나무들
찢긴 속살 위로 드러난 흰 뼈에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빛나는
승리의 기쁨!
폭풍은 숲을 이기지 못한다.
칼은 평화를 베지 못한다
이복현 1999년 대산창작기금 시 부문 및 《문학과의식》에 시 발표로 작품활동 시작. 1994년 중앙일보 시조 장원 및 1995년 《시조시학》 신인상 시조 등단. 시집 『사라진 것들의 주소』 외 4권, 시조집 『눈물이 타오르는 기도』 외 2권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