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꼭 붙어 잤다, 돌아누울 수도 없는 작은 굴속에서.
아빠의 단단한 근육이 쇠붙이처럼 내 뼈를 눌러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꼭두새벽에 내 손을 한번 꽉 잡아 주고 나갔다. 나도 곧 일어나 서울역 편의점에서 생수와 삼각김밥 두 개, 라면 한 봉지를 산 후, 기차를 탔다. 기차가 고층 빌딩과 빌딩 속에 에워싸인 쪽방촌을 힘차게 밀어냈다. 이제 이 기차가 달려가는 곳에서 광활한 하늘과 짙푸른 산, 넓은 들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늘은 하늘이라서 좋고, 산은 숲과 나무를 품어서 좋다. 푸르게 물결치는 들판이 황금색으로 변해서 추수를 할 때쯤, 아빠가 돌아오면 좋겠다. 아빠가 개선장군처럼 트랙터 위에 앉아서 잘 익은 벼들을 추수하고 알곡자루를 묶을 때, 나는 아빠를 향해 두 팔을 높이 흔들며 활짝 웃어 줄 것이다. -〈기차가 달려간 곳에는〉
“지금 네가 한 게 뭔지 알아?”
“내가 한 거라니?”
“너, 지금 수업 시간에 나왔잖아. 그거 결과야.”
“결과?”
“그래, 결과. 수업을 빼먹었잖아. 학교 안 가면 결석, 수업 빠지면 결과. 몰라?”
“아, 알지.”
동우는 지금 용어 따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결과는 나 하나로 됐으니까 넌 돌아가.”
동우가 가던 걸음을 재촉하자 세만이가 질세라 따라왔다.
“그냥은 못 가.”
“그럼?”
“너 데려가야지.”
동우는 기가 막혔다. 장세만, 원래 이렇게 엉뚱한 녀석이었나? 하긴 녀석에 대해 안다고 할 수도 없었다. 2학기도 반이 지나갔는데 세만이와 이야기를 길게 나누어 보거나 뭔가를 같이 한 기억이 없었다. 동우가 세만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학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정도였다. 실험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몰랐는데 너 좀 웃긴다.”
동우의 말에 세만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오늘 같은 행동을 할 줄 몰랐어.” -〈결과의 결과〉
은결은 날숨을 길게 쉰 다음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기척이 없었으나 은결은 큰 소리로 말했다.
“큰이모, 주무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술친구가요.”
은결은 마른침을 삼키며 방문에 귀를 댔다. 잠시 뒤 끄응, 큰이모의 기척이 들리더니 딸깍, 스위치 누르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은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아침노을이 깔린 것처럼 은은했다. 협탁에 놓인 조명 때문이었다. 은결의 마음도 그 불빛처럼 일렁거렸다. 지금이 매직 아워야, 은결은 낮게 읊조리면서 문지방을 넘었다. -〈매직 아워〉
따라라라라라라라라 따라라라라라라라라― .
회전목마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수빈이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엄마 아빠랑 놀이공원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땐 인생의 오르막길이었지. 그리고 서서히 목마가 아래로 치닫기 시작한다. 수빈이가 태어나고, 수빈이가 아프고, 엄마도 아팠다. 그리고 나는 두 친구들에게 약속을 못 지켰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눈물이 쏟아졌다. 손가락이 마구 떨리며 건반에서 미끄러졌다.
음이 벗어나서 마구 헝클어졌다. 정말 망하고 있었다. 아찔했다. 그만 멈출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래, 기왕 망한 거 아주 망해 버리지 뭐. 입술을 깨물며 허공에서 짧은 순간 손을 풀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다시 건반 위로 돌아와 두어 번 실수를 연발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망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이 페이스를 찾아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반사경〉
평소와는 다른 주말 풍경이었다. 엄마와 내가 있던 위치가 바뀌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겨우 해치웠다. 먹은 건 얼마 안 되는데 설거지거리는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미스터리했다. 오래 서 있었더니 발이 너무 아파서 스트레칭을 했다.
엄마는 어느새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엄마!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자. 엎드려서 자면 힘들어, 응?”
이번에는 내가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 잔소리에 담긴 마음이 어떤 맛인지 살짝 느껴졌다. 우리의 레시피는 앞으로 어떤 맛을 낼까 궁금해졌다. -〈엄마의 최애〉
지나에게도 따로 호를 하나 지어 주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나는 이제서야 지나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가 지나와 하고 싶은 것 말고 지나라는 존재 자체에게 바랐던 것은 뭐였을까? 세상과 차단된 껍데기 말고 밀폐장치 속 지나의 진짜 얼굴은 어떻게 생겼던 걸까?
지나에 대한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면서 오늘 처음 목격한 나의 얼굴도 점점 더 또렷해졌다. 지나를 생각하는데 나 자신이 선명해지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