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5km. PCT pacific crest trail
멕시코 국경에서 출발하여 미국의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3개 주를 관통하여 캐나다 매닝파크에 이르는 이 길은 걷는 자들에게 꿈의 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불린다. 사막, 협곡, 호수 등 다양한 자연환경을 마주하며 곰, 방울뱀, 모기 등 걷는 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야생 동물들을 수시로 만나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셰릴 스프레이드의 책과 영화 〈와일드〉의 배경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길이다.
이 길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길의 전 과정을 자신이 먹고, 생활해야 할 모든 짐을 스스로 메고 걸어야 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텐트와 침낭 등 야영장비 뿐 아니라 음식까지 며칠마다 나타나는 보급지에 우편으로 미리 보내 놓은 보급품을 찾아가며 일정을 진행해야 한다. 운행에 필수품인 물마저 며칠 분량을 스스로 메고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것만 아니라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이 길은 더욱 특별하다.
보통 3-4월에 멕시코에서 출발한 도보 여행자들은 10월이나 되어 캐나다 남부의 종착 지점으로 거지꼴이 되어 도착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온전히 완주하는 하이커는 연간 몇 명 되지도 않는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이 길을 한국의 아줌마 부대가 걸어 냈다. 때론 여럿이 대부분 단둘이.
출발은 함께 했지만 길을 모두 완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모두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고 각자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설적인 산꾼인 남난희와 94 에베레스트 원정 대원이었던 정건이 이 길을 모두 걷고, 걷는 기간의 과정과 단상을 정리해 한 권의 책을 만들어냈다. 무려 5년에 걸친 고군분투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그 시기에 5년간 매년 한 달씩 걸어 4,285km, 그 길을 걸었다.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4,285km를 그들은 걷는다.
매일 우리의 일상은 반복된다. 걷기 아니면 먹기 그리고 잠자기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삶을 산다. 길이 삶을 이토록 단순하게 해 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보통 10시간 정도 걷는 것 같고, 10시간 정도 쉬거나 누워있거나 자는 것 같다. 그 외의 시간은 먹고, 물 정수하고, 막영을 준비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156p)
생각도 줄어들고, 걱정도 사라지고, 궁금한 것도 없어진다. 대신 어디까지 가야 하고, 얼마나 왔고, 어디에다 캠프를 칠까? 날씨는 어떤가? 이런 것들에만 관심이 있고 집중을 한다.
얼마나 단순한 삶인가? 걷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고 다니느라 등짐은 무겁지만 생활은 더없이 간편하다. 이렇게 아무 걱정하지 않고, 무엇에 얽매이지도 않고, 욕심부릴 것도 없고, 누구를 시샘할 일도 없는 원초적 일상이 나는 좋다. (157p)
길은 내가 걷지 않으면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되뇌며 사막을 지나고 설산을 지나 마침내 원하는 곳에 다다른다.
자기가 살아가는 온갖 짐을 등에 지고 걸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작게 사는 것, 적게 먹고 적게 버리는 것, 그것이 자연과 나를 아끼는 방법이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길이 스승인 것이다. 스스로 알게 하는, 오로지 체험만이 참 공부다. (160p)
그렇지 않아도 행복에 겨운데 건이가 짠하고 맥주 한 캔을 내민다. 이 친구, 자기는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나를 위해 나 몰래 지고 왔나 보다. 우리는 짐의 무게 때문에 칫솔도 반 토막으로 잘라서 가지고 다닌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줄여버리는 짐인데 맥주라니. 나는 감동한다. (189p)
길에서 울고 웃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삶을, 자신의 삶을 보듬는다. 먼저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고 황망하게 잃은 친구를 기억한다. 또 다른 이는 에베레스트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최종 캠프에서 정상이 아닌 아래로 내려오며 들었던 아픈 마음. 세월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던 상처 깊은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서로가 하기 힘든 얘기를 하고 난 후 약간 먹먹했지만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친다. 잘 됐다고, 나도 너도 오히려 잘 됐다고 말한다. 진심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 각자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다면 지금 살아 이 PCT를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등 떠밀리듯 더 높은 산을 전전하다가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195p)
우리가 걸은 트레일은 단조로움이 함축된 세계다. 매일 똑같은 리듬과 지극한 단순함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인위적인 규칙이나 규범, 기준이 없는 곳이다. 오직 자연과 인간적인 척도만 있는 곳이 우리의 세상이었던 PCT다. 모든 것을 스스로, 오로지 자신이 행하고 자신이 책임진다. 철저히 독립적으로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본인이 스스로 자연임을 인식하게 하는 그 시간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330p)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걷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매일 매일이 내 생애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고.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PCT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이런 내가 좋았고 걷고 있는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믿었다. 이젠 그 PCT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이다. 특혜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허락해 준 PCT와 지난날 함께한 산우들에게 감사한다. 이렇게 길을 마무리하는 가슴 한편에서는 〈BTS〉의 노래 가사처럼 나의 최고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다가올 그것을 위해 나는 다시 가슴이 설렌다. (5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