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뜩 흐려있던 하늘에서 가랑비까지 찔끔거렸다. 바람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편동풍이 3일 동안이나 불고 있었다. 수평선에서는 그르렁거리는 천둥소리만 들려올 뿐 바람은 잦아들 기미조차 없었다.
바우로 넘쳐드는 파도는 세일데크를 물바다로 만들며 이사벨라 항로까지 허옇게 지웠다. 타륜을 잡고 있는 그녀는 몰려오는 두려움으로 떨었다. 그녀가 그토록 고대해온 일이었으나 막상 산더미 같은 파도와 맞닥뜨리니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바다, 하늘, 파도…. 이사벨라는 바우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이사벨라가 파도에 짓눌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릴 때마다 ‘이제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습기로 뒤덮인 대기는 후덥지근했고, 파도는 마치 거대한 붕새가 수평선을 삐죽삐죽 쪼아놓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언제쯤 이 광란의 파티가 끝날까?
리우데자이네루항 예수상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뱃사람을 맞듯 바람을 잔뜩 머금은 메인세일은 찢어질 듯 부풀어져 있었다. 메인세일 가장자리는 엄청난 바람의 힘에 쉬지 않고 펄럭였다. 야생의 초원에서 포식자에게 쫓기다 겨우 도망쳐 헐떡이는 짐승 같았다. 강풍에 메인세일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바람이 조금 잦아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간간이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바람은 더 세어질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메인세일을 접어서 바람으로부터 받는 장력을 줄여야만 했다.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녀는 하네스를 핸드레일에 걸었다. 철컥하고 스냅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조타를 자동으로 전환하고 신중하게 콕핏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세일데크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어떤 곤경에 빠질지 그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젠장!
이사벨라는 파도에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고 횡요가 큰 까닭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녀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다시 쿵 소리가 들리며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 순간 이사벨라 바우 앞 해수면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바닷물 덩어리가 그녀를 덮쳤다. 온몸을 뒤덮은 바닷물 속에서도 크르릉거리며 지나가는 파도의 굉음이 들렸다. 그녀는 들으면 안 될 소리를 들은 것처럼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정말로 떠날 거야?”
폰툰을 걸어오던 희수가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결심을 되돌리기 위한 회유였다. 그러나 그녀의 남태평양 항해는 이미 선언된 일이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출항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선언이라기보다 그녀가 지금까지 떠나보낸 시간들과의 약속이었다.
방파제로 둘러싸인 수영만 마리나에는 여러 개 폰툰이 있었다. 폰툰마다 쌍동선인 카타마란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십 척 요트가 계류되어 있었다. 맞은 편 안벽에는 주말을 맞아 해양소년단의 딩기강습을 참관하러 나온 보호자들로 붐볐다. 봄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마리나의 조경을 위해 심어 놓은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이 흰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오랜 꿈이었어. 그래서 이사벨라를 타는 거야. 마침내 시간이 되었어. 쇼 타임인거지. 떠날 거야…. 잘 다녀올게. 잘 있어.”
파도가 그녀의 몸을 흩어가는 짧은 동안 희수와 나누었던 대화가 물보라 소리처럼 쟁쟁거렸다. 다시 쿵 소리가 들리며 파도가 덮쳤다. 그녀는 핸드레일과 연결된 하네스의 안전줄을 꽉 움켜잡았다.
-덤벼 봐. 덤벼 봐.
그녀는 파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술을 들썩였다. 그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순간적으로 바람과 바람의 주기가 늘어지며 파도가 잦아들었던 것이다. 사실 바람이 분다고 해서 똑같은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대기압의 이동인데, 이동 속력에 의하여 바람의 세기가 결정이 되며 그 힘의 전달로 파도가 생겨난다. 그런데 대기압의 골은 똑같은 간격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바람이 불어오는 중에도 세어졌다가 약해지고, 다시 세어지는 주기가 생겨나며 그 주기에 의하여 파도도 높이가 달라진다. 숙련된 항해사들은 이런 순간을 직관적으로 알아내며 항해에 이용한다. 예를 들면 황천항해에서 히브 투를 하다가 라이 투로 전환한다던가 자이빙이나 크로스홀드로 전환하는 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녀는 메인세일을 향하여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마음뿐이었다. 어느 틈엔가 허벅지의 힘이 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재차 두려움이 엄습했다.
-남태평양 단독항주를 결정한 일이 잘한 일인가? 언제까지 폭풍 속을 헤매야 하는가?
등댓불조차 비추지 않는 폭풍 속 바다에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롯이 그녀 자신 뿐. 그렇다고 수영만 마리나로 회항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메인세일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파도…, 또다시 달려드는 파도. 그녀는 흔들리는 이사벨라 세일데크 위에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4미터… 3미터….
겨우 5미터 남짓한 메인마스트는 까마득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그녀가 평생 동안 기어가도 도착할 수 없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가며 끙끙거렸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기었다. 그러면서도 파도가 덮쳐오면 하네스에 연결된 안전줄을 움켜쥔 채 바닷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마침내 그녀는 메인마스트에 도착했고 축범용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인세일을 줄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강한 바람 탓에 도무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빨리하고 돌아가서 쉬어야지.
그러나 그녀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꽤나 애를 먹다가 마침내 마무리하였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녀가 축범을 마치자 이사벨라가 받는 바람의 장력이 줄어든 탓에 롤링과 피칭 각도는 현저히 작아졌다. 열대바다였지만 파도와 드잡이를 하느라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서둘러 콕핏으로 돌아왔다.
파도가 어둠에 묻혀 사라지며 바다는 언제 파도가 쳤는지 모를 정도로 잔잔해졌다. 이사벨라 주변으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파도 위로 가고 있는지, 파도 속으로 그녀가 달려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요티의 주신인 포세이돈에게 다가가는 세 가지는 육지와의 단절, 황천 속 난파, 절대 고독이라더니… 바다가 이렇게 고요하다니.
그녀가 몰려오는 어둠 속에서 혼자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있는 그때, 뭉글한 느낌의 물체가 종아리를 툭 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콕핏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사벨라가 항해하는 바닷물 주변에 날치 떼가 마치 이사벨라와 경주를 하듯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바람이 여전히 세었지만 날치 떼가 비상하기 위하여 파도를 지친 주변에는 수많은 동심원이 물수제비처럼 떠 있었다. 그녀의 단독항해가 일탈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 일으킨 파문처럼… 날치무리가 닿고 싶은 목적지가 콜럼버스처럼 이사벨라라 여긴 걸까? 여러 마리 중 한 마리가 그녀의 종아리로 불시착했던 것이다.
그녀가 타고 있는 이사벨라의 원래 이름은 프린스호였다. 37피트 레이스급으로 10년 전 일본의 전문기술진에 의해서 건조된 요트였는데 그녀는 프린스호를 인수하자마자 이사벨라라고 선명을 바꾸었다. 이사벨라는 열흘 전 수영만 마리나를 벗어났다. 그 당시 출항이라는, 난데없는 이별통보를, 그것도 친구인 희수로부터 전해들은 경훈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녀는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덮쳐온 황천으로 인해 은근히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은 기우로 끝나지 않았다. 동쪽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항해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래서 언제 타이티에 닿을까 싶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사벨라가 두 동강이라도 나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파도와 바람에 당할 걸 알면서도 출항을 늦추지 않았다.
“3~4일 후면 저기압이 지나가고 고기압이 들어온다는데 꼭 지금 출항해야 하겠니?”
희수는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면서 출항을 늦추라고 했다.
“일기예보라는 게 어디 믿을 것이 되니. 저기압이라 해도 봄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실 출항하기 며칠 전부터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이 들면 번번이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났다. 이제는 전 남편이 되어버린 광희가 마약에 취해 뒷덜미를 낚아채거나, 아파트의 절반을 내놓으라며 목을 죄는 꿈에 깨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광희에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출항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녀가 담배를 빼내 물었다. 불도 붙이기 전에 날아드는 물보라로 담배가 흠씬 젖어버렸다. 악천후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 탓인지 흔히 볼 수 있는 똥갈매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태평양」 중에서